이보다 더 절망적인 구호가 있을까. 내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이 어렵더라도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공부하고 일하며 세금을 낸다. 그런데 한 나라의 청년들이 자신들에게 내일이 없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시위 구호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선언이다.
2026년 가을 프랑스 전역에서 확산한 학생 시위는 교사 부족과 낡은 학교시설, 교육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생활비 부담과 취업 불안,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겹쳤다. 10월 6일에는 프랑스 내무부 집계로 약 26만6000명이 거리로 나왔다.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과 경찰의 강경 대응을 둘러싼 논란까지 불거졌다.
프랑스 정부는 학교시설 개선과 대학 정원 확대, 입학제도 개편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청년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들이 묻는 것은 학교시설을 언제 고쳐주느냐는 문제만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가, 성실하게 일하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가, 부모 세대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프랑스의 위기, 복지 자체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위기다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발전된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나라다. 연금과 의료, 교육, 노동자 보호는 프랑스 사회가 오랫동안 자랑해 온 성취다. 그러나 고령화와 성장 둔화가 진행되면서 이를 유지하는 비용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특히 연금제도는 세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영역이다. 프랑스는 국내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공적연금에 지출하는 국가다. 은퇴자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지만, 그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제도는 불안정해진다.
1982년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는 법정 퇴직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60세로 낮췄다. 당시에는 경제와 인구구조가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늘고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후 프랑스는 연금개혁을 거듭 추진했다. 2023년에는 법정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단계적으로 64세까지 높이는 개혁을 시행했으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2026년 사회보장재정법에 따라 관련 연령 상향 일정의 일부가 2028년까지 유예됐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연금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한번 형성된 권리를 조정하려면 국민적 신뢰와 설득, 세대 간 공정한 부담 배분이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의 청년 시위 원인을 연금 하나로 돌려서는 안 된다. 교육투자 부족과 노동시장 진입 장벽, 주거비 부담, 지역·계층 간 격차도 함께 작용한다. 복지지출이 크다는 사실만으로 교육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문제의 본질은 복지의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재정 능력과 정책 우선순위, 그리고 세대 간 부담의 균형이다.
스위스는 왜 기본소득에 반대표를 던졌는가
프랑스와 비교해 볼 만한 나라가 스위스다. 2016년 6월 스위스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결과는 찬성 약 23%, 반대 약 77%였다.스위스 국민이 사회복지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스위스 역시 연금과 의료보험, 실업보험 등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있다.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것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라는 특정한 제도였다.
그 과정에서 제기된 핵심 쟁점은 재원 조달의 현실성과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였다.
스위스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정책의 취지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재원과 실행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정치제도에는 국민투표와 직접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이 비용과 편익을 함께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적 전통이 존재한다.
물론 스위스가 모든 면에서 프랑스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두 나라의 산업구조와 인구, 정치제도, 복지체계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미래의 부담을 따져 정책을 결정하는 자세만큼은 우리가 진지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좋은 복지는 많이 약속하는 복지가 아니라 오래 지킬 수 있는 복지다.
대한민국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혼란은 한국 사회에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빠른 고령화와 저출생에 직면해 있다. 생산연령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성장률이 둔화하면 세입 기반도 약해진다.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 공적연금의 장기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의 재정도 함께 살펴야 한다.
여기에 국가채무 증가와 지방재정의 부담, 각종 공공기관의 부채 문제까지 겹쳐 있다.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새로운 지원금과 복지 확대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10년 뒤와 30년 뒤 누가 부담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정부와 국회는 복지정책을 추진할 때 재정 추계와 세대별 부담, 장기적인 경제적 효과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인기 있는 정책보다 책임 있는 정책이 우선돼야 한다.
동시에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교육과 연구개발, 청년 일자리 같은 미래투자를 무차별적으로 줄여서도 안 된다. 당장의 지출을 줄이는 것과 국가의 미래 성장 능력을 키우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지원금보다 기회다
프랑스 청년들의 분노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일자리와 기회의 문제다.정부가 청년에게 생활비와 구직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금만으로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기업이 투자하고 성장하며 새로운 인력을 채용할 수 있는 산업 환경을 만드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일회성 지원만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자리를 얻고, 일한 만큼 보상받으며, 주거와 결혼, 출산과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사회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중소기업의 생산성과 근로환경을 높여야 한다. 대학 교육과 산업 현장의 수요를 연결하고, AI와 반도체, 바이오, 로봇, 에너지 등 새로운 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교육개혁도 단순히 대학 입시제도를 바꾸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 직업 전환 역량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국가가 청년에게 제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복지는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다.
국가 운영의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대비는 대한민국의 정치와 행정에 세 가지 과제를 던진다.첫째, 모든 주요 재정정책에 세대 간 형평성 평가를 도입해야 한다. 현재의 혜택이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얼마나 이전되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둘째, 연금과 의료, 교육, 노동시장 개혁을 따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 고령화와 생산성, 청년 고용과 재정 건전성은 서로 연결돼 있다. 범정부 차원의 장기적인 국가개혁 전략이 필요하다.
셋째, 정부가 바뀌어도 유지할 수 있는 중장기 재정 원칙과 사회적 합의를 확립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정책이 정권 교체 때마다 뒤집힌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여야 정치권 역시 복지를 둘러싼 소모적인 이념 대결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지 확대와 재정 건전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필요한 사람을 충분히 보호하면서도 제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정치의 능력이다.
국가의 재정은 무한한 금고가 아니다. 국민이 땀 흘려 창출한 소득에서 마련한 공동의 자산이다. 그 자산은 현재 세대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 청년들이 외치는 '취소된 내일'은 국가가 미래 세대와 맺은 약속이 흔들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고한다. 스위스의 국민투표는 선의와 재정적 책임을 함께 고려하는 민주적 판단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이 두 사례에서 모두 배워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따뜻한 국가이면서, 다음 세대의 기회를 빼앗지 않는 책임 있는 국가가 돼야 한다.
좋은 정치는 오늘의 박수를 얻는 정치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지키는 정치다.
좋은 복지는 오늘의 행복을 보장하면서 내일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된 복지다.
그리고 진정한 선진국은 현재 세대가 누리는 풍요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 얼마나 건전한 재정과 양질의 일자리, 좋은 교육과 건강한 자연환경을 물려주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청년들의 내일만큼은 결코 취소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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