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상호 감독 "'실낙원', 어머니가 쓴 글에서 시작…낯선 심리 궁금했다"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연상호 감독은 한 가지 장르나 규모에 머문 적이 없다. '부산행'과 '지옥' 등으로 거대한 재난과 초자연적 현상을 그려온 그는 신작 '실낙원'에서 인물의 깊은 내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작 '얼굴'에 이어 다시 가족의 균열을 마주한 이 작품은 거대한 사건 대신 내면의 붕괴를 촘촘하게 짚어낸다. '연니버스'의 계보 위 '실낙원'은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심리극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실낙원'은 어머니가 쓴 글로부터 시작된 영화입니다. 원안에는 한 마을에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데 아들이 닭도 훔치고 사람도 때리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녀요. 어머니가 고통을 겪다가 결국 아들을 품에 품고 소멸을 결심하는 이야기였어요. 어머니가 직접 쓰신 걸 보여주셨고 저는 그걸 보고 '이건 어떤 심리일까'가 궁금해졌어요."

'실낙원'의 뼈대는 연 감독 어머니의 글에서 출발했다. 어머니와 류용재 작가가 함께 다듬은 원안은 오성은 작가의 소설 '블랙 인페르노'로 출간됐고 영화로 구체화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아들로서 사실 어머니를 너무 잘 모르면서도 오랫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마음은 좀 궁금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궁금증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어요. 찾아보니 2020년에 쓴 글이더라고요. 그동안 그 관점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간도 재미있었어요."

작품의 심리적 기저에는 두 편의 고전이 자리한다. 한 인간의 선택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지 묻는 카뮈의 '이방인'과 낙원을 무너뜨리는 원초적 감정에 주목한 존 밀턴의 '실낙원'이다.

"예술대학을 다닐 때 '이방인' 주인공은 무슨 심리였을까를 놓고 토론한 적이 있어요. 결국 실존에 대한 토론이었겠죠. 지금 AI가 중요한 존재가 된 시대에는 그런 질문이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류소영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관객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실존에 대한 토론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실낙원'에서는 천사가 사탄이 되고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질투에서 시작되잖아요. 저는 '질투'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질투는 영화의 시작부터 여러 인물을 관통한다.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납치범의 시선에서 시작해 9년 만에 돌아온 선우가 엄마 곁을 차지한 AI 속 어린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오프닝에서 납치범이 류소영을 한 번 쓱 돌아보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그걸 일종의 질투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를 향한 질투 같은 거죠. 류선우도 일종의 뱀처럼 생각했고 이후 집에 돌아온 선우가 AI 아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모습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었어요."

선우의 폭력적인 행동 역시 단순한 쾌락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연 감독이 바라본 선우의 핵심은 오랫동안 자신을 규정해온 정체성이 친엄마 소영을 만나며 다시 흔들리는 과정이었다.

"저는 쾌락의 문제라기보다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납치범이 '너는 내 아들이 돼라'라고 하는 순간부터 선우는 오랫동안 납치범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온 인물이라고 봤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류소영이 '넌 내 아들이야'라고 말할 때 자기가 규정해왔던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배현성 배우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선우의 모든 행동에 친절한 해답을 마련해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완벽하게 이해되기 어려운 존재여야 했고 선우 역시 속내를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불편함을 가진 인물로 설계했다.

"이 영화에 있는 인물들은 다 100%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에 마미야라는 굉장히 불쾌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 불쾌함의 근원 중 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봤어요. 처음 생각했던 류선우도 그런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영화 실낙원 스틸컷 사진CJ ENM
영화 '실낙원' 스틸컷 [사진=CJ ENM]

영화의 마지막에 놓인 소영의 선택도 같은 맥락이다.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납득할 답보다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이해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연 감독이 원했던 지점이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심리도 이성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잖아요. 류소영의 마지막 선택도 정확히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해되길 바랐어요. 완벽하게 설명되는 건 AI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인간에게는 '설명하지 못하겠는데 이해가 간다'는 감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영화로서 도달하고 싶은 지점도 그거였어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간극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복잡한 내면을 가진 류소영 역에는 다시 한번 김현주를 선택했다.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쌓은 신뢰와 함께 자신이 만들어온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라는 믿음이 컸다.

"기본적으로 연기를 굉장히 잘하는 배우고 제가 그동안 만들어온 세계를 잘 표현해주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저예산 영화라 생판 모르는 배우에게 선뜻 제안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고요. 먼저 대본을 드리고 '이런 게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어요. 흔쾌히 해보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시작된 작품이에요."

9년 만에 돌아온 선우 역의 배현성은 '지옥2'에서의 짧은 만남이 계기가 됐다. 한 회차에 불과했지만 당시 보여준 몰입력이 강하게 남았다.

"'지옥2'에서 김신록 배우의 아들로 마지막에 잠깐 특별출연을 했는데 그때 인상 깊었어요. 몰입도가 남달랐는데 워낙 짧게 나와서 아쉬웠죠. 그러다 생각해보니 제 영화에는 의외로 젊은 남자 배우가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없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배현성 배우가 떠올랐어요."

'실낙원'은 전작 '얼굴'에 이어 비교적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 연 감독에게 작은 영화는 단순히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결과를 얻기 위한 실험이다.

"'얼굴'을 할 때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와는 영혼이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창작하는 사람은 늘 지금까지와 다른 걸 해보고 싶잖아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새로운 영혼을 만들려면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작 방식 자체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본 거죠."

여기에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나눈 대화도 영향을 미쳤다. 충분한 조건과 자원보다 때로는 결핍이 새로운 미학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께 롱테이크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없어서 촬영감독과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찍을지만 이야기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영화의 미학이 결핍에서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스스로 결핍된 상황을 만들어볼 필요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영화 '실낙원' 연상호 감독 [사진=CJ ENM]

다만 상업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 작은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기존 독립영화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분명했다. '얼굴'과 '실낙원'에서 독립영화 제작지원이나 인정 제도를 이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상업영화를 하던 감독이 독립영화 영역에 들어가서 기존 산업의 질서를 흐트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얼굴' 때도 독립영화 제작지원이나 독립영화 인정 같은 걸 받지 않았고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에요. 기존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작업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작은 규모의 영화만을 이상적인 작업 방식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자신과 닮은 작품을 만드는 기쁨과 대중에게 폭넓게 닿는 영화를 만드는 기쁨은 서로 다르지만 어느 하나를 포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를 만들 때는 이 영화의 정체성이 곧 나라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산행'을 하면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했죠. 밖에 나가면 아이들이 좀비 흉내를 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제 영화를 알고 있는 걸 보는 건 또 다른 기쁨이었어요. 나와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과 모든 사람이 아는 영화를 만드는 기쁨 중 어느 게 더 낫다고 하기는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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