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지난 2월 초안에 이어 지난달 최종안을 발표한 정부와 여당의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방안」은 한국 ESG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이다. 거래소 자율공시라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사업보고서 직접 편입이라는 강제력 있는 법정공시 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2028년(2027사업연도) 연결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291개사)를 시작으로, 2029년 5조 원 이상(3,171개사)으로 확대 적용한다는 로드맵은 제도의 외형적 기틀을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방안은 외형만 그럴듯할 뿐 나침반이 잘못된 화물선과 같다. 거대한 선체와 정교한 항해 장비를 갖추었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 없다. 당장 회계법인의 반응을 보면 항로의 오류를 짐작할 수 있다. 삼정KPMG, 삼일PwC 등 대형 회계법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감사위원회를 위한 지속가능성 공시 준비 감독 가이드’ 등을 발간하고 세미나를 열며 내부통제와 재무영향분석, 제3자 인증 등 비재무 검증 시장 선점에 분주하다. 그러나 소비자주권시민회의(7월 15일)와 국가인권위원회(7월 16일) 등이 거센 비판과 아쉬움의 목소리를 남겼듯 회계업계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같은 방향인 건 아니다.
이번 정부 여당의 공시 방안은 법정 의무화라는 방향 자체는 맞지만,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공개할 것인가라는 핵심 철학의 첫 단추가 근본적으로 잘못 꿰어졌다. 이대로 제도가 안착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끌어내기는커녕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중복 비용과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핵심은 ESG 공시 본연의 목적과 공시 철학의 실종이다. ESG 공시는 단순히 자본시장의 투자 정보 제공 수단이 아니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발생시킨 환경 파괴, 인권 침해, 노동 착취, 공급망 위험, 지역사회 피해 등 사회적 비용과 영향을 사회에 투명하게 드러내고 검증받는 공적 장치다.
그러나 정부의 최종안은 국제회계기준재단(IFRS) 산하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기준을 토대로 한 KSSB 공시 기준을 고수했다. ISSB 기준은 투자자의 재무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만을 선별하는 ‘단일 중대성(Single Materiality)’ 체계다. 지속가능성 공시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투자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재무공시의 확장이자 수익성을 보조하는 지표에 불과하다.
단일 중대성 체계하에서는 공급망 내 인권 침해, 지역사회 환경 오염, 노동권 훼손 등의 이슈가 당장 기업의 단기적 재무 손실로 입증되지 않는 한 공시 항목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기업의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치명적 영향(Impact)을 외면한 채, 기업의 재무제표에 미치는 여파만 측정하겠다는 것은 ESG 공시를 기업의 지속가능한 이윤만을 보위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셈이다.
회계업계의 환호와 인권위의 경고
이러한 단일 중대성 체계의 수혜자는 명확하다. 한국회계기준원(KSSB) 중심의 제도 수립 속에서 대형 회계법인들은 비재무 검증 시장을 새로운 먹거리로 독식할 채비를 마쳤다. 삼정KPMG가 발표한 보고서처럼, 회계업계는 지속가능성 공시 감독을 “기존 회계감독 기능의 연장선”으로 규정하고 내부통제 구축, 재무제표 연계성 점검, 외부 인증 감독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삼일PwC 역시 금융회사 등을 대상으로 한 지속가능성 공시 대응 전략에서 “금융회사 지속가능성 공시의 핵심 과제는 재무영향분석”임을 명확히 제시했다. 기후 및 비재무 리스크가 기업과 금융기관의 자산 가치, 재무 성과에 미치는 영향만을 정밀하게 산출하겠다는 생각으로, 지속가능성 공시가 철저히 재무영향 평가에 국한해야 한다는 회계업계의 대응 논리를 보여준다. 재무 감사와 비재무 검증을 동일 직역이 수행함에 따른 심각한 이해충돌 우려가 제기됨에도, 공시 제도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검증하는 장치가 아니라 회계업계의 시장 확장 수단으로 귀결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위원장 명의의 성명을 통해 공시 최종안에 깊은 아쉬움과 경고를 표명했다. 인권위는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이 국제사회의 기본 책무로 자리 잡았음에도 기후 정보에 국한된 공시는 한계가 명확하다”며 향후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 등 보완 과정에서 ▲기업의 인권경영 체계 ▲인권실사 수행 여부 및 구제 결과 ▲공급망 인권 위험 관리 ▲이해관계자 소통 등 인권 관련 핵심 정보를 법정 의무 공시 항목으로 반드시 편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종안이 인권과 노동 등 사회(S) 영역의 핵심 지표들을 거래소 자율공시라는 미온적인 영역으로 후퇴시킨 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글로벌 격리와 ‘이중 보고’의 비용
정부는 기업의 수용성과 부담 완화를 명분으로 단일 중대성 체계를 내세웠지만,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얘기다. 글로벌 시장은 이미 기업이 환경·사회에 미치는 영향(Impact Materiality)과 재무적 영향(Financial Materiality)을 동시에 다루는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 체계로 전환했다.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성 공시 규제 체계(CSRD/ESRS)는 적용 대상을 단계적으로 비EU 기업까지 확대하며 이중 중대성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KPMG의 2024년 글로벌 지속가능성 보고 조사에 따르면 세계 58개국 매출 상위 250대 기업(G250)의 77%, 각국 상위 100대 기업(N100)의 71%가 이중 중대성을 채택한 GRI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역시 2025년 발간된 주요 기업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99%가 이미 GRI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그럼에도 정부가 국내 공시를 ISSB 중심 단일 중대성에 가두어 두면서, EU 등 해외 시장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과 많은 수출 협력업체들은 국내 법정공시용 ISSB 보고서와 해외 규제 및 글로벌 공급망 대응용 이중 중대성(GRI/ESRS) 보고서를 각각 따로 작성해야 하는 ‘이중 보고’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기업 부담을 줄여주겠다던 정부 정책이 도리어 기업에 이중의 행정적·재무적 비용을 지우는 기형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특정 업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다.
자율공시에 방치된 사회(S)
정부 최종안의 더 큰 문제는 구조적 이원화에 있다.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에 강제되는 것은 ‘투자자용 기후 재무정보’뿐이다. 기후 외 환경(E) 지표와 인권·노동·공급망 등 사회(S) 영역, 거버넌스(G) 지표, 그리고 기업 활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모두 거래소 자율공시로 밀려났다.
정부가 제시한 자율공시 유인책은 공시우수법인 가점, 상장수수료 면제 등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법적 의무도, 제재도, 검증도 없는 자율공시 체계에서 기업이 공급망 인권 침해나 환경오염, 산업재해 같은 불리한 악재를 자발적으로 공개할 리 만무하다. 유리한 성과는 홍보성으로 포장하고 불리한 영향은 침묵하는 관행이 제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상품과 서비스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비용을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와 시민의 알 권리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사실 스코프3 공시 등의 유예 같은 건 해외 동향을 보며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 또한 환경과 사회 공시 내용 또한 기업 규모와 국제 동향을 보며 천천히 채워 나가도 된다. 문제는 철학의 부재와 방향의 오류가 국가 경쟁력을 훼손하고 사회적 낭비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시민 없는 거버넌스
이러한 문제점은 공시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거버넌스에서 시민사회를 완전히 배제한 데서 이미 예고되었다. 법령 정비, 인증제도, 공시이행지원, 금융지원 등 4개 분과로 구성된 실무 워킹그룹에는 정부 부처, 금융기관, 회계기준원, 경제단체, 민간 전문가들이 망라되어 있으나 소비자단체와 시민사회의 자리는 전무했다. 공시의 설계부터 운영, 검증까지 시장 참여자들만의 리그로 짜인 구조에서는 ‘사회가 기업을 감시한다’는 ESG의 근본 취지가 작동할 수 없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공시 목적을 단순 투자자 정보 제공이 아닌 ‘사회적 영향과 책임 공개’ 체계로 전면 재정립해야 한다. 자본시장법 개정 과정에서 ‘이중 중대성’ 도입 로드맵을 명문화면서 인권·노동·공급망 위험 등 사회(S) 영역과 지배구조(G) 핵심 지표를 자율공시에 방치하지 말고 의무공시로 편입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 소비자와 시민의 참여가 구조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ESG 공시의 법정 의무화는 가야 할 길이다. 당정이 밝힌 대로 공시 여건이 성숙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이끌어나가는 전략 재설정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방향이 투자자만을 위한 재무 정보의 확장에 머문다면, 사회 전체와 자본시장의 ESG 수준은 오히려 퇴행할 것이다.
ESG 공시는 기업의 이익을 변명하는 문서가 아니라, 그 이익이 어떤 사회적·환경적 비용 위에서 창출되었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로드맵의 이행 속도가 아니라 공시 정책의 방향 전환이다. 정부와 국회가 자본시장법 개정 과정에서 공시 철학을 근본적인 재설정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ESG 공시는 기업의 이윤만을 보위하고 회계업계의 배만 부리우는 빈 껍데기라는 비판을 결코 면치 못할 것이다. 정부와 여당, 특히 금융당국이 회계법인의 이익을 지키는 데 앞장서느라 ESG 공시의 근본을 망가뜨리는 일이 중단되어야 한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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