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태의 중남미 포커스] 도시 전체를 캠퍼스로, 글로벌 인재는 청소년기부터

  • 중남미 국가에서 한국형 '프리컬리지' 수요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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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태, 중남미 전문 전 외교관]
 
인공지능 전환, 이른바 AX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기술과 자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서로 다른 지식을 연결하며, 아이디어를 기술과 제품, 서비스로 구현할 수 있는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국가와 산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인재 확보도 이미 능력이 검증된 전문가를 영입하는 단계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 있는 청소년을 일찍 발견하고, 그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연구·산업 생태계와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의 잠재 인재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신뢰를 형성하느냐가 장기적인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우리 정부와 대학도 외국인 유학생 유치와 대학 국제화, 우수 인재의 국내 정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의 상당 부분은 학생이 이미 한국 유학을 결정했거나 대학에 지원한 이후의 모집과 관리, 졸업 후 취업과 정착에 집중돼 있다.
 
정작 세계의 청소년들이 한국을 처음 경험하고 자신의 적성과 진로, 미래를 한국과 연결해 생각하도록 만드는 대학 입학 이전 단계는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 글로벌 인재 유치의 ‘앞단’을 놓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대학들은 오래전부터 여름과 겨울방학을 활용해 청소년 대상 프리칼리지(중·고등학생을 위한 대학 예비·진로 탐색 과정)와 캠퍼스 체험과정을 운영해 왔다. 학생들은 대학 수업과 생활을 미리 경험하고 세계 각국의 또래와 교류하며 자신의 전공과 진로를 탐색한다. 대학은 미래의 우수 학생을 조기에 만나고, 도시는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며, 국가는 장기적인 글로벌 인재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나는 이러한 공백을 중남미 학부모들의 요청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이들은 북미와 유럽에는 청소년들이 방학 동안 대학과 문화를 경험할 다양한 과정이 있지만, 한국에는 대학과 첨단산업, 문화콘텐츠를 체계적으로 접할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처음에는 일부 한류 팬 가정의 관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콜롬비아와 멕시코, 페루, 미국 마이애미의 중남미계 주요 사립학교들과 직접 접촉했다. 적지 않은 학교가 이미 방학마다 학생들을 단체로 해외에 보내는 교육·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고, 한국에 신뢰할 만한 교육과정과 안전관리 체계가 마련된다면 새로운 목적지로 검토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교육의 질과 안전이 보장된다면 항공료와 교육비, 숙박비를 학부모가 부담할 의향도 확인했다.
 
주한 중남미 국가 대사관들도 처음에는 미성년자의 안전과 생활 관리를 우려했다. 그러나 현지 학교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입국해 전 일정에 동행하고 국내에서도 체계적인 보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설명하자 의미 있는 청소년 교류가 될 수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중남미에서 공부하고 9개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약 40년을 생활했다. 대사관 근무 당시에는 우수한 현지 학생들의 한국 유학을 지원했고, 지금도 국내 중남미 유학생들의 정착과 진로를 돕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현지 반응을 종합하면 한국형 프리칼리지에 대한 수요는 충분하다. 

문제는 세계의 청소년들이 한국에 관심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이미 형성된 관심을 교육과 진로 탐색, 장기적인 인재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과정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대학을 넘어 도시 전체를 캠퍼스로
 
한국은 미국과 유럽의 대학 중심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오늘날 청소년들이 원하는 융합적이고 체험적인 교육을 제공하기에 더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청소년들은 특정 대학의 전공 설명만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서 만들어진 지식이 연구기관과 기업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하나의 아이디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기술과 제품, 서비스와 문화콘텐츠로 발전하는지를 직접 보고 싶어 한다.
 
한국에는 비교적 안전한 생활환경과 편리한 대중교통이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 첨단기업과 문화시설도 가까운 거리에 밀집해 있다. 학생들은 짧은 기간에도 인공지능과 반도체, 로봇과 바이오, 미래 자동차와 스마트시티를 경험하는 한편, K팝과 드라마, 영화와 게임, 웹툰이 기획·제작돼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과정까지 살펴볼 수 있다.
 
한류는 세계 청소년들의 시선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매력이다. 그러나 한국의 진정한 경쟁력은 완성된 문화상품에만 있지 않다.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이 협력하고 아이디어를 빠르게 기술과 제품, 서비스로 구현하는 역동적인 생태계가 더 큰 자산이다.
 
세계의 청소년들은 한국에서 지식과 아이디어가 연구와 기술을 거쳐 산업과 시장, 문화와 사회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견학이 아니다. 학생들이 자신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발견하게 하는 진로 탐색이자,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또래들과 협력하는 미래 교육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로그램을 어느 한 대학의 이름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 도시가 플랫폼이 되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과 국제기구, 문화기관이 각자의 전문성과 시설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 대학은 전공 강의와 캠퍼스 체험을, 연구기관은 새로운 기술과 연구 현장을, 기업은 아이디어가 제품과 서비스로 구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 운영기관은 숙박과 이동, 보험과 생활 관리를 맡고, 현지 학교 교사와 국내 인솔자가 학생 보호를 함께 책임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열린 캠퍼스이자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된다.
 
한국 청소년들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과 세계의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하고 토론하며 인공지능과 기후변화, 미래도시와 문화콘텐츠를 주제로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친구들과 이견을 조율하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창의성, 소통 능력, 공감 능력과 리더십이 길러진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댄 청소년들이 10년, 20년 뒤 각국의 과학자와 기업인, 정책 담당자와 문화예술인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우정과 신뢰는 일회성 국가홍보로는 만들기 어려운 장기적인 인적 자산이다.
 
지방정부가 만드는 글로벌 인재 플랫폼
 
도시형 프리칼리지에서 지방정부는 단순한 행사 후원자가 아니다. 지역의 대학과 연구소, 기업과 문화기관을 연결하고 도시의 미래산업과 교육자원을 하나의 국제교육 과정으로 설계하는 플랫폼 구축자가 돼야 한다.
 
시범지역으로는 송도가 적합하다. 외국대학과 국제기구, 연구기관과 바이오·정보기술 기업이 모여 있고 인천국제공항과도 가깝다. 그러나 이 구상을 송도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대전은 과학기술, 울산은 자동차와 조선, 광주는 인공지능과 문화, 부산은 해양과 물류 등 각 지역의 강점을 교육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다.
 
지방정부는 특정 대학에 예산을 나눠주는 데 그치지 말고, 지역산업과 연계된 우수 교육과정을 공개적으로 선정해 대학 간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 각 대학은 규모나 서열이 아니라 자신이 경쟁력을 가진 분야로 참여하고, 기업과 연구기관은 현장 체험과 프로젝트를 제공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학생들은 여러 대학과 연구소, 산업 현장을 경험하며 자신의 적성과 관심에 맞는 진로를 찾을 수 있다. 대학은 잠재 유학생을 조기에 만나고, 기업과 연구기관은 미래의 글로벌 인재와 해외 학교 네트워크를 접할 수 있다. 도시는 교육과 산업의 경쟁력을 세계에 알리는 새로운 브랜드를 얻게 된다.
 
청소년 과정과 함께 학부모와 교사를 위한 별도 프로그램도 운영할 수 있다. 학생들이 수업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동안 학부모와 교사에게 한국의 교육제도, 의료와 문화, 지역산업과 투자 환경을 소개하는 것이다. 학생 한 사람의 방문이 한 가정과 학교, 나아가 두 도시와 두 국가 간의 지속적인 교류로 확대될 수 있다.
 
안전을 보장하되 가능성의 문은 열어야
 
해외 학교와 학부모, 주한 대사관들의 관심은 확인됐지만, 국내에서 프로그램을 현실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성년자의 안전과 사고 책임에 관한 명확한 운영 기준과 역할 분담 구조가 부족하다 보니 대학과 관계기관도 새로운 프로그램에 선뜻 참여하기 어려웠다.
 
학생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호자 동의와 현지 교사의 동행, 국내 전문 인솔자와 생활 관리자 배치, 남녀 숙소 분리, 야간 관리, 의료기관 연계, 보험 가입과 비상 대응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안전 기준의 존재가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국제교육 프로그램에 적용할 명확한 기준과 책임 분담 구조가 없다는 데 있다. 기존의 수련 활동이나 단체관광 틀에만 맞추려 하면 충분한 보호조치를 갖춘 프로그램조차 시작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대규모 사업으로 추진할 필요는 없다. 지방정부가 중심이 돼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 해외 학교, 전문 운영기관이 참여하는 소규모 시범 과정을 운영하면 된다. 안전성과 교육 효과를 검증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여름·겨울 정례과정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정부는 운영기관의 자격, 학생 보호와 숙박·의료·보험 기준, 사고 발생 시 책임 범위를 담은 표준지침을 마련해 현장의 불확실성을 줄여야 한다.
 
한류는 세계 청소년들의 시선을 한국으로 이끌었다. 이제 그 관심을 일시적인 방문과 소비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 산업과 미래 인재 네트워크로 연결해야 한다.
 
도시형 프리칼리지는 청소년을 잠시 머물다 가는 방문객으로 맞는 사업이 아니다. 도시 전체를 캠퍼스로 만들고 세계의 잠재 인재와 대학·연구·산업을 연결하는 장기적인 국가 인재전략이다.
 
몇 주간의 체험을 귀국 후 온라인 공동수업과 후속 프로젝트, 국제 동문 네트워크로 이어간다면 짧은 방문은 수십 년간 지속되는 외교·경제·문화의 인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모든 참가자가 반드시 한국 대학에 진학할 필요도 없다. 청소년기에 한국을 깊이 경험한 이들이 훗날 각국의 기업인과 과학자, 공무원과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해 한국과 협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국가적 자산이다.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은 대학 입학 단계가 아니라, 세계의 청소년들이 어느 도시에서 자신의 미래를 처음 발견하느냐에서 시작된다.

필자 주요 이력

△중남미 전문 외교관 출신 △세바 국제행정 컨설팅 대표 △ 국가 공인 행정사(일반행사, 스페인어 번역 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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