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토를 이해하는 두 번째 문은 신사(神社)다. 신토의 출발점은 자연의 신성함이었다. 산과 바다, 숲과 강, 바위와 폭포, 태양과 바람 속에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감각이 신토의 뿌리였다. 그러나 자연의 신성함이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려면 그것을 기억하고, 모시고, 반복해서 만나게 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공간이 바로 신사다. 신사는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조상과 후손, 마을과 신성함을 잇는 일본식 영성의 현장이다.
신사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도리이(鳥居)다. 붉은색 또는 나무색의 문처럼 서 있는 도리이는 일본 신토를 상징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다. 도리이는 단순한 출입문이 아니다. 그것은 속세와 신성한 공간을 가르는 경계다. 사람은 도리이를 지나면서 일상의 소음과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다. 장사와 경쟁, 분노와 계산, 피로와 번민의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 앞에 서는 마음으로 들어간다. 신토는 말이 많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도리이 하나만으로도 많은 말을 한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달리하라는 것이다.
도리이가 중요한 이유는 신토가 공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신토에는 불교의 대장경이나 기독교의 성경처럼 절대적 권위를 가진 단일 경전이 없다. 대신 신토는 공간과 의례, 몸짓과 반복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도리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참배길을 걸으며, 손과 입을 씻고, 신전 앞에서 절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신앙 언어다. 일본인은 신을 긴 문장으로 설명하기보다 신성한 공간 안에서 몸을 낮추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신사 입구에는 대개 데미즈야 또는 초즈야라고 불리는 물이 있다. 참배객은 그곳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이것은 단순한 위생 행위가 아니다. 신토에서 물은 정화의 상징이다. 인간은 일상을 살면서 마음이 흐트러지고 몸이 더러워지며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는다. 신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돈해야 한다. 손을 씻는 것은 행동을 맑게 하겠다는 뜻이고, 입을 헹구는 것은 말을 조심하겠다는 뜻이다. 신토의 정화 의례는 인간에게 말한다. 신성한 것을 만나려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신사 참배의 기본 예법도 의미가 깊다. 흔히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을 치고, 다시 한 번 절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신사마다 세부 예법은 다를 수 있지만, 이 기본 구조에는 신토의 정신이 들어 있다. 절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다. 손뼉은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행위이자 마음을 깨우는 행위다. 마지막 절은 감사와 다짐의 표시다. 이것은 복을 구하는 주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신성한 질서 앞에서 마음을 다시 세우는 행위다.
신사에는 대개 본전과 배전이 있다. 본전은 가미(神)가 모셔진 중심 공간이고, 배전은 사람들이 예를 올리는 공간이다. 그러나 신사의 본질은 건물만이 아니다. 신사를 둘러싼 숲, 참배길, 오래된 나무, 돌등, 물, 바람까지 모두 신사의 일부다. 특히 신사를 둘러싼 숲은 일본 신토의 자연관을 잘 보여준다. 신사는 자연 속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신성함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이 조심스럽게 공간을 만든 것이다. 신사 숲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신성한 숲이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은 이런 신토 공간의 대표적 사례다. 이세신궁은 일본인에게 가장 신성한 신사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왕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세신궁이 특별한 이유는 권위 때문만이 아니다. 오래된 건물을 영원히 붙잡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마다 새로 지어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 때문이다. 건물은 새로워지지만 형식과 정신은 이어진다. 나무는 바뀌지만 장인의 손길은 이어진다. 이것은 신토가 가진 갱신의 철학이다. 영원은 낡은 것을 그대로 붙잡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잃지 않고 새롭게 이어가는 데 있다는 뜻이다.
교토의 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稲荷神社)도 신토의 대중적 얼굴을 보여준다. 수많은 붉은 도리이가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장면은 세계인이 기억하는 일본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이나리는 농업과 풍요, 상업의 신으로 널리 숭배되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풍년을 빌었고, 상업사회에서는 장사의 번창을 빌었다. 이처럼 신토의 가미는 추상적 교리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사람들의 생활과 생업, 밥과 일과 꿈 속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신토는 일본인의 삶 가까이에 있었다.
도쿄의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근대 일본의 상징적 인물인 메이지 일왕과 쇼켄 왕후를 모신 신사로, 도심 한복판의 거대한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메이지신궁은 신토가 근대 국가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일본인이 도시 속에서도 자연의 침묵을 찾는 방식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 첫 참배를 위해 신사를 찾고, 결혼식을 올리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신사에 간다. 신토는 여전히 일본인의 생활 의례 속에 살아 있다.
신사는 조상 숭배와도 연결된다. 일본 신토에서 조상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아니다. 조상은 가족과 마을의 뿌리이며, 후손의 삶을 지켜보는 존재다. 조상 숭배는 인간이 홀로 태어나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우리는 누군가의 후손이고, 누군가에게 이어질 선조다. 신토의 조상 숭배는 바로 이 연속성의 감각을 강화한다. 오늘의 나는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기억과 혈연과 공동체 속에서 이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이 점은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도 산신, 성황당, 당산나무, 조상 제사, 마을 굿의 전통이 있었다. 마을 어귀의 큰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고, 산과 강에 제사를 지내며, 조상에게 예를 올렸다. 동아시아 농경문명은 자연과 조상을 분리하지 않았다. 일본 신토의 신사 문화는 이러한 동아시아적 감각을 일본식으로 제도화하고 공간화한 것이다. 다만 일본은 그것을 신사라는 형태로 강하게 유지했고, 한국은 유교와 불교와 무속과 민간신앙 속에 다양하게 흩어져 보존해 왔다.
신사의 힘은 반복에 있다. 사람들은 새해에 신사에 가고,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데려가며, 입학과 취업과 결혼과 사업의 고비마다 신사에 간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으로만 볼 수 없다. 인간은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보다 큰 질서 앞에서 마음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신사는 그런 마음의 정거장이다. 바쁜 삶 속에서 멈추고, 씻고, 절하고, 감사하고, 다시 시작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신사 문화는 언제나 순수한 자연 영성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신사는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국가 권력과도 연결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사 문화의 본래적 의미와 역사적 변질 가능성을 함께 보는 균형이다. 신사는 자연과 조상과 공동체를 잇는 아름다운 공간이 될 수 있지만, 국가주의와 결합할 때는 위험한 동원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영성은 인간을 낮추는 힘이어야지, 권력을 절대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 마쓰리(祭り), 일본인의 공동체를 움직이는 축제의 영성
신사가 공간의 영성이라면 마쓰리는 움직이는 영성이다. 신사가 신성한 곳을 마련한다면, 마쓰리는 그 신성함을 사람들 사이로 불러낸다. 마쓰리는 축제이지만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의례이고, 마을이 자신을 확인하는 공동체 행위이며, 계절과 노동과 기억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장치다. 일본의 마쓰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인의 공동체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마쓰리의 출발은 감사와 기원이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자연에 의존했다. 비가 제때 와야 하고, 태풍이 지나쳐야 하며, 벼가 익어야 하고, 바다가 풍성해야 했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밥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신에게 풍요를 빌고, 수확 뒤에는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마쓰리는 바로 이 감사와 기원의 리듬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방식이었다.
마쓰리에는 대개 미코시(神輿)라는 가마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신이 임한 가마를 메고 마을을 돈다. 북소리와 피리 소리, 구호와 행렬, 춤과 음식, 등불과 깃발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다. 신성한 존재가 신사 안에만 머물지 않고 마을 전체를 돌아본다는 의미가 있다. 신은 신전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골목, 시장, 집, 논밭, 바닷가로 나오는 존재다. 마쓰리는 신성함을 공동체 전체로 확장하는 행위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공동체의 일부임을 다시 확인한다. 마쓰리는 혼자 할 수 없다. 누군가는 가마를 메고, 누군가는 음식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길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돌보고, 누군가는 북을 치고, 누군가는 기도를 올린다. 축제는 역할의 질서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조력자다. 이것이 마쓰리의 사회적 힘이다. 평소에는 각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축제를 통해 하나의 마을로 다시 모인다.
일본 사회의 질서 의식과 협동 문화는 이런 마쓰리 전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마쓰리는 사람들에게 공동의 규칙을 가르친다. 자기 마음대로 앞서 나가면 행렬이 무너진다. 자기 역할을 소홀히 하면 전체가 흔들린다. 가마를 멜 때도 호흡이 맞아야 한다. 한 사람만 힘을 쓰면 안 되고, 한 사람만 빠져도 안 된다. 이것은 공동체의 훈련이다. 마쓰리는 즐거움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 안에는 책임과 협력의 윤리가 들어 있다.
마쓰리는 지역 정체성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일본 각지에는 저마다 다른 마쓰리가 있다. 교토의 기온마쓰리(祇園祭), 오사카의 덴진마쓰리(天神祭), 도쿄의 간다마쓰리(神田祭), 아오모리의 네부타마쓰리, 삿포로의 눈 축제처럼 지역의 역사와 기후와 생업이 축제의 형태로 살아 있다. 어떤 곳은 전염병과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 축제를 시작했고, 어떤 곳은 풍어와 풍년을 빌기 위해 축제를 이어왔다. 마쓰리는 지역이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마쓰리는 단순한 관광 상품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많은 마쓰리는 관광과 지역경제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공동체의 기억이 있다. 어떤 마을이 수백 년 동안 같은 축제를 이어왔다는 것은, 그 마을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축제는 사라지기 쉬운 기억을 몸으로 보존한다. 글로 읽는 역사가 아니라, 걷고 메고 노래하고 먹고 춤추는 역사다.
신토의 조상 숭배도 마쓰리 속에서 살아난다. 일본의 많은 축제는 단지 자연신에게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켜온 조상과 선인들의 기억을 함께 품고 있다. 조상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조상은 공동체의 윤리와 질서 속에 살아 있다. 후손들은 축제를 통해 조상에게 감사하고, 자신들도 언젠가 후손에게 기억될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시간의 공동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질서 안에 놓인다.
신토와 불교의 관계도 여기서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 신토와 불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를 신불습합이라고 한다. 신은 부처의 현현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불교 사찰과 신사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삶의 복을 신사에서 빌고, 죽음과 내세의 문제는 불교에 맡기는 방식으로 종교를 생활 속에서 조화시켰다. 교리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활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공존이었다. 일본인의 종교관은 배타적 신앙 고백보다 실천적 조화를 중시해 왔다.
이러한 종교적 유연성은 일본 문화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장점은 관용과 조화다. 여러 신앙과 의례가 생활 속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는 원칙의 흐릿함이다. 종교가 삶의 습속으로만 남을 때, 권력과 결합해도 그 위험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할 수 있다. 신토가 근대 국가주의와 결합했던 역사도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사와 마쓰리가 일본인의 생활을 어떻게 지탱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신사는 멈춤의 공간이고, 마쓰리는 움직임의 시간이다. 신사는 개인이 마음을 씻는 곳이고, 마쓰리는 공동체가 몸을 맞추는 시간이다. 신사는 자연과 조상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하고, 마쓰리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신토는 일본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현대사회는 공동체를 빠르게 해체하고 있다. 도시화는 마을을 약하게 만들었고, 디지털 문명은 사람을 연결하면서도 동시에 고립시켰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깊은 소속감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신사와 마쓰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혼자만의 자유로 충분한가. 공동체의 기억 없이 건강한 개인이 가능한가. 축제와 의례 없이 사회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한국 사회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마을 공동체의 전통이 있었고, 당산제와 성황제, 두레와 품앗이, 세시풍속과 명절이 있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졌다. 일본의 마쓰리를 무조건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의례와 축제의 힘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일만으로도 살지 않는다. 사람은 함께 기억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시간을 통해 공동체의 인간이 된다.
신사와 마쓰리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관계의 회복’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산 사람과 조상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일상과 신성의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얻었지만 관계를 잃었다. 자연은 자원이 되었고, 조상은 사진이 되었으며, 이웃은 익명의 타인이 되었고, 축제는 소비 이벤트가 되었다. 신토의 신사와 마쓰리는 그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신토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신토는 일본의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자연에 대한 경외, 조상에 대한 기억, 공동체에 대한 책임, 공간을 정화하는 감각, 계절을 기념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전체가 함께 성찰할 가치가 있다. 좋은 것은 배우고, 위험한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자세다.
결국 일본 신토의 두 번째 얼굴은 공동체다. 20편의 신토가 자연의 신성함을 말한다면, 21편의 신토는 그 신성함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신사는 신성한 공간을 만들고, 도리이는 경계를 세우며, 정화 의식은 마음을 씻게 하고, 참배는 인간을 낮추며, 마쓰리는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묶는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일본인의 생활 영성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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