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한국 경제가 축배를 들고 있다. 2분기 경상흑자 1166억 달러로 세계 2위다. '제조업 강국' 독일과 일본의 흑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 3국 비교가 가능해진 199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IMF는 올해 한국의 흑자를 4219억 달러, GDP 대비 18.8%로 내다본다. 외환위기 직후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입이 쪼그라들면서 생긴 '불황형 흑자' 1998년의 기록을 두 배 가까이 갈아치울 기세다.
그런데 축배 뒤 계산서를 보면 손이 떨린다. 수출의 50%, 시가총액의 47%가 반도체다. 올 1월만 해도 31%였던 수출 비중이 불과 8개월 만에 절반으로 치솟았다. 나라 경제의 절반이 한 품목에 걸려 있다. 이것은 '강국'의 지표가 아니라 '쏠림'의 지표다. 지금 한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칩이 불러온 독감, '칩플루(Chip-flu)'다.
수량이 아닌 가격이 만든 흑자, 실력보다 운이 컸다
그렇다면 그 가격은 누가 올렸나. 불편하지만 답은 한국의 실력이 아니라 운이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이대로 가면 한국 반도체는 망한다는 곡소리가 넘쳤다. 그사이 한국이 경쟁자를 압도할 기술 혁명을 이룬 것이 아니다. 미·중 기술전쟁과 미국의 대중 AI칩 규제가 중국의 AI칩 국산화를 재촉해 중국이 메모리를 쓸어 담았고, 3년 전 불황기의 투자 축소로 공급은 바닥이었으며, 여기에 미국 클라우드서비스제공사업자(CSP)들의 영끌식 밈(meme) 데이터센터 투자가 겹쳤다. 남이 벌인 전쟁과 남이 지른 투자가 만든 횡재, 운칠복삼이다.
문제는 운으로 오른 가격은 유리병과 같다는 점이다. 수요가 조금만 꺾여도, 공급이 조금만 늘어도 산산조각 난다. 역사가 증명한다. 2018년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정점에서 모두가 '반도체 영원한 호황'을 외쳤지만 이듬해 D램 가격은 반 토막 났다. 2023년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한 해 15조원 가까운 적자를 냈다. 불과 3년 전 일이다. 1980년대 세계 D램 시장의 70%를 넘나들던 일본도 가격 전쟁과 미·일 반도체 협정의 협공 속에 무너졌고, 독일 키몬다와 일본 엘피다는 끝내 파산했다. 메모리 시장에서 호황의 정점은 늘 몰락의 출발점이었다.
지난 13일 중국 창신메모리의 기술 혁신 소식 하나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7~10% 급락하고 코스피가 5.5% 주저앉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리병에 금 가는 소리다. 운이 실력처럼 보일 때가 가장 위험하다. 운은 예고 없이 떠나기 때문이다.
사상 최대 이익에 주가는 반 토막, 시장은 이미 겨울을 본다
3분기 영업이익은 삼성전자 107조원, SK하이닉스 76조원 수준이다. 숫자만 보면 잔치인데 주가는 고점 대비 반 토막이다. 외국인은 연초 이후 두 회사 주식을 180조원어치 팔아치웠다. 시장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시장은 이익의 현재가 아니라 지속성을 산다. 주가는 실적의 거울이 아니라 미래의 망원경이다. 수요 쪽부터 균열이 보인다. 미국 데이터센터는 주민 반대와 전력, 용수 문제로 착공이 늦어지고 있다.
칩은 몇 달이면 찍어내지만 송전망과 발전소는 몇 년이 걸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데이터센터는 비싼 창고일 뿐이다. LLM 스케일링 법칙이 한계에 부딪치며 모델 학습용 투자는 피크아웃 조짐을 보이고, 에이전틱 AI로의 전환은 아직 과도기다. AI가 AI를 공격하는 무차별 해킹은 기업의 도입을 망설이게 하는 ‘AI 캐즘'까지 낳고 있다. 2000년 닷컴 버블 때 통신사들이 경쟁적으로 깔아 놓은 광케이블의 상당수가 수년간 불 꺼진 채 땅속에서 잠들었다. 인프라 투자가 수요를 앞질러 가면 반드시 청구서가 날아온다.
공급 쪽은 더 무섭다. IPO로 실탄을 채운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대규모 증산과 수율 투자에 나서며 범용 제품 수급을 위협한다. 중국은 태양광, 배터리, 전기차에서 이미 보여줬다. 국가가 밀고 자본이 붙으면 가격은 바닥까지 내려간다. 게다가 떼돈을 번 모든 메모리업체가 동시에 설비를 늘리고 있다. 메모리 역사에서 동시 증설의 끝은 언제나 공급과잉이었다.
네덜란드병과 칩플루(Chip-flu), 해 뜰 때 우산을 준비하라
1959년 네덜란드는 흐로닝언 가스전이라는 천운을 만났다. 달러가 쏟아지자 길더화 가치가 치솟았고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무너졌다. 횡재가 독이 된 '네덜란드병'이다.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는 더 극적이다. 오일머니를 복지와 보조금으로 뿌리다 유가가 꺾이자 국가 경제가 통째로 무너졌다.
반면 노르웨이는 같은 석유 횡재를 국부펀드에 쌓아 세계 최대 규모로 키웠고, 지금은 석유가 아니라 펀드가 나라를 먹여살린다. 같은 천운이 누구에게는 저주가, 누구에게는 축복이 됐다. 차이는 운이 아니라 운을 다루는 전략이었다.
남 얘기가 아니다. 반도체 달러가 몰리며 원·달러 환율은 1320원대로, 엔·원 환율은 100엔당 830원대로 내려왔다. 일본과 맞붙는 자동차와 조선, 석유화학은 비명을 지른다. 호황의 과실은 소수 기업과 주주에게 쏠리고 내수와 고용은 냉골인 K자 양극화가 깊어진다. 큰돈은 기쁨이 아니라 근심이 될 수 있다.
해법은 분명하다. 해 뜰 때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 운을 실력으로 바꾸는 전략이 곧 칩플루(Chip-flu) 백신이다. 범용 메모리 시황에 목숨을 거는 구조에서 벗어나 HBM과 맞춤형 메모리, 시스템반도체로 가격 결정력을 사야 한다. 반도체가 벌어온 달러는 소부장과 AI, 전력 인프라 같은 다음 세대 산업의 체력을 기르는 데 써야 하고, 공급과잉의 절벽에 대비한 재정과 금융의 완충장치도 호황인 지금 쌓아야 한다.
가장 경계할 것은 갈라먹기다. 세수 풍년이라며 퍼주기와 나눠먹기 경쟁에 빠지면 소탐대실이다. 베네수엘라의 길이다. 황금비는 즐기되 취하면 망한다. 지금 내리는 황금비를 4년 뒤 다이아몬드비로 바꿀 구조와 전략을 짜는 것, 그것이 천운을 맞은 한국의 숙제다.
전병서 필자 주요 이력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겸임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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