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서울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고 다채롭다. 성수동의 감각적인 쇼핑 거리를 걷고, 경복궁에서 단아한 한복을 입은 채 추억을 남기며, 전 세계를 강타한 K-팝의 역동적인 에너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일상적인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상업적 화려함과 고옥탄 대중문화의 열풍 뒤편에는 훨씬 더 깊고 내성적인 울림을 품은 또 다른 음악적 풍경이 숨 쉬고 있다. 바로 한국의 클래식 음악이 지닌 단단한 내면의 세계다.
한 국가의 국제적 매력과 국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소프트파워(Soft Power)'가 강조되는 시대다.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친근하고 활력 넘치는 얼굴이라면 오랜 세월 지적·예술적 깊이를 다져온 클래식 음악은 그 나라의 진정한 문화적 깊이와 품격을 증명하는 고급문화(High Culture)의 정수다. K-팝이 전 세계인을 한국이라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끌어당기는 열정적인 문이라면 클래식은 그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정갈하고 깊이 있는 한국의 문화적 영혼이다. 대중문화의 화려함과 순수예술의 깊이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한 국가의 문화적 소프트파워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리게 된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은 세계 클래식계가 가장 주목하는 예술적 보물창고다. 주요 국제 콩쿠르의 무대마다 상위를 석권하며 경이로운 기량을 선보이는 한국의 젊은 비르투오소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전설적인 거장들 역시 한국의 뛰어난 신예 연주자들과 협업하는 데 열광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나 일시적인 열풍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품은 높은 교육적 열정과 뛰어난 예술적 자질이 만들어낸 자부심 넘치는 결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란한 인재들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 클래식 음악 생태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외롭고 아슬아슬한 항해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거두는 젊은 연주자들의 승리가 개인의 뛰어난 성취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그 결실이 우리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문화적 자산으로 뿌리내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공공과 민간의 과감하고 체계적인 버팀목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년 가을 서울의 밤을 클래식 선율로 물들이는 서울국제음악제(SIMF)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나 음악의 성지 빈처럼 오랫동안 글로벌 도시들의 품격과 정체성은 그 도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와 궤를 같이해 왔다. 한국 역시 통영국제음악제나 평창대관령음악제처럼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음악제들이 우뚝 서 있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정통 플래그십 음악 축제는 SIMF가 유일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대도시가 품은 쉼 없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클래식이라는 정제된 정서적 언어로 환원해 내는 소중한 문화적 가교인 셈이다.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이라는 음향적 성전에서 펼쳐지는 SIMF의 무대는 무엇보다 '세대 간 교감과 확장'이라는 특별한 예술적 가치를 선사한다. 독주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가졌지만 자칫 고립되기 쉬운 국내의 젊은 솔리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온 전설적인 거장들과 한 무대에 올라 호흡을 맞춘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개성으로 시작했던 연주가 무대를 거듭할수록 완벽한 화학적 결합을 이루고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튜닝처럼 웅장한 클라이맥스로 피어나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이러한 예술적 도전과 실험은 오랜 시간 축제를 지휘해 온 류재준 예술감독의 탁월한 음악적 철학이 있기에 가능했다. 폴란드의 거장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를 사사한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위주로 편중되기 쉬운 국내 클래식 시장의 익숙한 관행에 과감히 화두를 던진다. 특히 치열하고 다단했던 한 해를 보낸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와 치유를 건네고자 선정한 올해 음악제의 메인 테마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처럼 축제는 삶과 예술을 아우르는 깊은 정서적 울림을 전했다. 목관과 금관 앙상블의 매력을 극대화한 실내악부터 관객들에게 생소한 유럽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의 숨겨진 명곡을 한국에 초연하는 대담함까지 SIMF는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클래식의 지평을 꾸준히 넓혀왔다.
하지만 이토록 소중한 고급문화의 장과 순수 예술의 토양은 연주자 개인의 열정이나 소수 예술가들의 사명감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아무리 비옥한 씨앗이 있어도 비와 햇살이 부족하면 숲을 이루지 못하듯 클래식 생태계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기업의 정성 어린 메세나(Mecenat) 활동과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 및 정부 부문의 장기적이고 장벽 없는 투자가 손을 잡아야 한다.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이나 당장의 관객 수라는 단기적인 대중성의 잣대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 사회의 지적 품격과 영혼을 지탱하는 순수 예술에 물을 주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울시 역시 단편적인 행사성 지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서울국제음악제와 같은 수도 대표 클래식 브랜드가 잘츠부르크나 빈의 축제처럼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안정적인 인프라와 공공 지원 정책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기업들 또한 단발성 후원을 넘어 예술가들의 장기적인 창작 기반을 마련해 주는 문화적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문화적 위상은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할 것이다.
K-팝이 modern Korea의 활기차고 매력적인 표정이라면 오랜 시간 정성스레 가꾸어 온 클래식 음악은 우리 사회의 단단한 영혼이자 문화적 품격을 완성하는 고급문화의 정수다.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글로벌 무대로 거세게 확산되는 지금, 우리의 문화예술 생태계 역시 긴 호흡으로 본질을 다지는 클래식 토양에 더욱 깊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서울시와 기업, 그리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따뜻한 후원자로 손을 맞잡을 때 K-클래식이 품은 그 숭고한 예술적 영혼은 전 세계를 향해 한층 더 풍요롭고 찬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전 CNN 서울지국장 ▷전 외교부 문화협력대사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국제방송) 사장 ▷전 대통령실 해외홍보 비서관 ▷전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전 뉴욕타임스 기자 ▷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