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民 '멸칭 전쟁'…사람들은 왜 혐오에 빠질까?

  • 정체성 융합·도덕적 확신·사회적 보상…혐오를 강화하는 심리 기제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쟁을 벌인 김민석 대표 정청래 의원 송영길 의원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쟁을 벌인 김민석 대표, 정청래 의원, 송영길 의원 [사진=연합뉴스]

최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전후로 기묘한 말들이 등장했다. 문재인·조국·김어준·정청래·유시민을 한데 묶어 비하하는 '문조털래유', 반대편에서는 한준호·강득구·김민석·이동형·김용민·이언주·송영길을 엮은 '한강새똥돼주길'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김민새' 같은 멸칭도 오갔다. 서로 다른 정당의 지지자들이 벌인 싸움도 아니었다. 같은 민주당 지지층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정치인의 행보를 혹독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떤 이들은 의견을 반박하는 대신 사람에게 멸칭을 붙인다. 정책이 아니라 인성을 공격하고, 상대편 지지자까지 하나의 부류로 묶어 한껏 조롱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진이 22대 총선과 관련해 온라인 커뮤니티 6곳의 게시물 4359건과 댓글 3만 9313건을 분석한 결과, 댓글의 20.3%에서 혐오 표현이 확인됐다. 그 가운데 정치 성향과 관련한 혐오 표현이 42.5%, 욕설이 38.8%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정치적 갈등에 혐오의 언어가 끼어드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눈길을 끄는 건 최근 전당대회에서 그 공격이 같은 진영 안으로까지 향했다는 점이다. '적'의 경계가 이토록 쉽게 바뀐다면, 미움은 정말 상대에게서만 비롯되는 걸까.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쟁을 벌인 김민석 대표 정청래 의원 송영길 의원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경쟁을 벌인 김민석 대표, 정청래 의원, 송영길 의원 [사진=연합뉴스]

모든 미움을 문제 삼자는 얘기는 아니다. 분노해야 할 부당함도, 책임을 물어야 할 잘못도 있다. 문제는 혐오할 대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는 하루를 넘기지 않는 사람들. 그날그날 혐오의 메뉴는 바뀐다. 오늘은 정치인, 내일은 연예인, 모레는 직장 동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터넷 속 누군가일 수도 있다. 메뉴판은 바뀌지만 주방장은 늘 같다.

혐오에는 흔히 분노가 따라붙는다. 분노는 때로 고각성의 진통제처럼 쓰인다. 복잡한 세계를 놀랍도록 간단하게 만든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을 때는 답답하지만, "저 사람이 문제"라고 결론 내리는 순간 세상은 선명해진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 불확실성은 사라지고 판단만 남는다.

특히 정치는 생각과 자아가 쉽게 뒤섞이는 영역이다. 정치적 신념이 곧 자신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면, 반대 의견도 그저 다른 생각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를 공격하는 말처럼 느껴질 수 있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질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상대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넘어,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기 시작한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야."

여기에 도덕적 확신이 덧칠된다. 자신이 옳기 때문에 화났다고 느끼면, 화내는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누군가를 몰아붙이면서도 자신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분노에는 명분이 생기고, 공격의 문턱은 낮아진다.

이 습관은 보상과 연결돼 더 단단해진다. 화를 쏟아내면 같은 편이 박수를 보내고, 독한 말에는 공감과 호응이 붙는다. 즉각적인 사회적 보상이다. 오늘의 박수는 내일 더 강한 분노를 부른다. 알고리즘은 그 강도를 학습해 같은 결을 더 추천한다. 화내고 싶은 것만 남는 폐회로가 완성된다.

그렇게 미움이 루틴이 된다. 혐오를 소비하고, 축적하고, 반복한다. 비난이 곧 개념이고 혐오가 곧 윤리라고 착각한다. 사람을 겨누고, 의심을 뿌리고, 혐오를 나눈다. 그리고는 말한다.

"미친 거 아니야?"
"당연히 욕먹어야지."
"이건 비판일 뿐이야."

처음의 분노는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격을 반복할수록 습관에 가까워지고, 혐오는 그 습관을 먹고 자란다. '내가 옳다'는 확신과 '넌 틀렸다'는 선고를 거듭하며 존재감을 쌓는다. 정의로운 분노라는 명분 아래 공격의 쾌감도 반복된다. 중독처럼 다음 자극을 기다리게 된다.

현실의 문제는 느리다. 몸을 만드는 데는 몇 달 몇 년이 걸리고, 관계를 고치는 일은 지난하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면 실패와 무력감을 견뎌야 한다. 반면 누군가를 심판하는 일은 빠르다. '생각이 깊은 사람', '도덕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가장 쉬운 방법은 분노를 잘 말하는 것이다. 말 몇 마디로 나는 '진실을 아는 사람', '잘못을 알아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분노를 반복해서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불만이나 무력감을 분노로 밀어내는 경우도 있다. 무력감은 사람을 가라앉히지만 분노는 단숨에 각성을 끌어올린다. 한 번 분노에 올라탄 몸은 평범한 일상으로는 각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더 큰 사건, 더 독한 표현, 더 선명한 선악과 적이 필요해진다.

자신의 삶에서 의미감이나 통제감을 충분히 얻지 못해 공적 분노가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지보다, 누구를 싫어하는지가 나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혐오가 무서운 건 공격성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혐오에는 종료 조건이 없다. 한 사람이 사라지면 다음 사람이 필요하다. 혐오를 거두는 순간, 남는 건 공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과 마주하는 불편함,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침묵이 주는 두려움. 그래서 그들은 매일 비판하고, 매일 분노하고, 매일 승리한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이 모든 과정이 전혀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 안의 정의감은 늘 옳고, 상대는 늘 문제적이며, 세상은 언제나 바로잡아야 할 무언가로만 존재한다. 마침내 혐오는 체질이 된다.

우리는 이 체질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미워할 사람이 사라졌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괜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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