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기업의 선단공정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12년 차 연구원 A씨는 지난 6월 한 달간 약 50시간에 달하는 연장근로를 하고도 수당을 포기한 채 사실상 '공짜 야근'을 했다. 고객사에 대한 차세대 메모리 공급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막바지 개발 업무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3개월 기한으로 허용된 연장근로 한도 약 150시간을 불과 두 달 만에 모두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A씨가 속한 수율 개선 및 공정 기술 부서는 웨이퍼 투입부터 완성까지 수백 단계의 공정을 종합 분석해 불량 원인을 잡고 수율을 올리는 반도체 연구개발(R&D)의 최전선 조직이다. 짧게는 36시간, 길게는 수십 시간씩 연속적으로 수율 분석 장비를 모니터링하고 웨이퍼 결함을 추적한다. 제품 출시를 앞둔 개발 집중 기간이면 연구원들이 주·야간 교대조로 나뉘어 불철주야 연구실 불을 밝히는 이유다.
A씨는 "회사에서는 주 52시간 준수를 위해 PC 강제 셧다운제를 가동하고 초과 근무 소명 자료까지 요구한다"며 "수억원짜리 테스트 웨이퍼가 장비 안에서 돌며 데이터가 쏟아지는데 정시에 무작정 손을 털고 나가면 그에 따른 개발 손실은 고스란히 팀이 떠안게 된다"고 토로했다.
주요 반도체 연구 현장이 주 52시간제의 규제에 가로막혀 연구 연속성이 깨지고 무수당 연장근로가 상시화하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정부의 유연근로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반도체 개발 속도전을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11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등에 따르면 메모리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초과수당 없이 근무한다는 반도체 연구원들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한 작성자는 "오늘도 퇴근 태그만 찍고 바람도 쐴 겸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이렇게 일하는데 계측 결과라도 부디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씁쓸함을 전했다.
정부는 지난 2021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반도체, 소프트웨어 개발 등 연구개발(R&D) 직군에 한해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 기간을 기존 1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했다. 중요 프로젝트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겠다는 취지다.
업계는 여전히 실효성 떨어지는 제도라고 토로한다. 특정 주에 연장근로를 몰아서 할 수는 있지만, 3개월 기한 내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여전히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의 볼멘소리에도 정부는 현행 근로 제도만으로 초과 근무 대응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특별연장근로 제도가 있음에도 기업들이 신청조차 하지 않는다"며 주 52시간 예외 규정 없이도 대응 가능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특별연장근로제는 재해·재난이나 돌발 장비 사고 등으로 인가 요건이 한정돼 있다. 상시적이고 연속성이 핵심인 R&D 업무 특성상 노동부의 인가를 받기조차 힘들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하려면 근로자 개별 동의는 물론 업무량 폭증을 엄격히 증명해야 하고, 인가가 반려될 경우 집중 점검 대상이 되거나 불법 근로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어 기피한다"면서 "신청 실적이 저조한 것은 현행 제도로 충분해서가 아니라 까다로운 인가 요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대만 등 반도체 경쟁국들은 R&D 인력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 예외를 인정하며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을 활용해 연구진의 연장근로 한도를 없앴고, TSMC 역시 24시간 365일 연구실 불이 꺼지지 않는 3교대 R&D 체제를 가동 중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협회 전무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은 불과 몇 달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가혹한 기술 개발 경쟁"이라며 "한국만 획일적인 근로시간 규제로 연구진의 손발을 묶어두고 있는 만큼 핵심 R&D 직군에 대한 유연한 근로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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