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 원칙 상식] 사무실서 골프채 휘두른 선관위…국민 신뢰부터 회복하라

민주주의는 투표로 시작된다. 국민은 한 표를 통해 권력을 위임하고, 국가는 그 선택을 존중하는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며, 선거에 대한 신뢰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투표 결과에 대한 승복도 결국 선거 과정이 공정하고 정확하게 관리됐다는 믿음 위에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고 투표 시간이 연장되는 초유의 혼란이 벌어졌다. 선거의 정치적 결과를 떠나 국민의 참정권이 행정적 준비 부족으로 불편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투표용지는 선거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첨단 전산 시스템도 아니고 복잡한 법률 해석의 영역도 아니다. 유권자 수를 예측하고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은 선거관리위원회의 가장 기초적인 업무에 속한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 실무 착오를 넘어 조직 운영과 위기 대응 체계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선관위는 채용 논란과 복무 기강 문제, 각종 관리 부실 논란으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때마다 선관위는 개별 사안이라고 설명했지만, 국민은 개별 사건보다 반복되는 패턴을 본다. 조직에 대한 신뢰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작은 실망이 쌓이고, 해명보다 변명이 많아질 때 서서히 무너진다.

대구시 선관위 사진 연합뉴스
대구시 선관위 [사진= 연합뉴스]



최근 대구의 한 선관위 직원이 청사 내에서 골프 스윙 연습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당 직원은 점심시간에 한 행동이라고 해명했고, 현재 사실관계가 조사 중인 만큼 이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것만으로 조직 전체를 평가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문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러한 장면이 공개되자 많은 국민은 실망감을 표시했다. 골프채가 문제가 아니라 시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국민은 선관위 구성원 개인의 일상보다 선거 관리 실패 이후 조직 전체가 어떤 긴장감과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결국 이번 논란의 본질은 골프가 아니다. 선관위가 국민의 기대 수준에 부합하는 책임성과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선관위는 일반 행정기관과 다르다. 헌법이 보장한 독립기관이다. 독립성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선거를 관리하라는 의미다. 그러나 독립성이 무오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립기관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자기 통제와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 견제받지 않는 독립은 특권이 될 수 있지만, 책임을 수반하는 독립은 신뢰가 된다.


선관위 개혁 논의도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개혁이 아니라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개혁이어야 한다. 특정 사건을 계기로 선관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음모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그런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관위가 스스로를 성역처럼 여겨서도 안 된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독립기관은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 현장 대응은 왜 늦었는지, 내부 보고와 의사결정 체계는 적절했는지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객관적 평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선거 관리 시스템 전반의 디지털 혁신이 요구된다. AI와 데이터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다. 선거 수요 예측과 투표소 운영, 투표용지 수급 관리, 현장 상황 대응까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일에 "예상보다 많았다"는 식의 설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조직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공직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권한이 아니라 신뢰다. 신뢰는 법률로 강제할 수 없다. 구성원 스스로 높은 기준을 적용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보다 한 발 더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수많은 희생과 헌신 위에서 성장해 왔다. 국민은 투표소로 향하는 길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그렇다면 선관위는 그 한 표 한 표가 흔들림 없이 행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기관의 책무이고 존재 이유다.


기본은 신뢰다. 원칙은 책임이다. 상식은 국민의 참정권보다 우선하는 행정 편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선관위가 국민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계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어가 아니라 성찰이고, 해명이 아니라 개혁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선거이고, 선거의 기본은 신뢰다. 선관위가 환골탈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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