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5·18 논란에 칼 빼든 정용진, 기업의 역사 인식 어디까지인가

정용진 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과 맞물린 마케팅 논란에 대해 초강수 대응에 나섰다. 계열사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이사를 전격 해임하고 관련 임직원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한 것이다. 논란 확산 직후 최고경영진이 직접 개입해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대응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른 편이다. 그러나 이번 사안을 단순한 인사 조치로만 볼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논란의 핵심은 특정 마케팅 문구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연상시켰다는 점이다. 일부 표현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기업 측이 해당 의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소비자에게 불쾌감과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안의 본질은 ‘의도’보다 ‘결과’에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기업은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조직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지는 주체다. 특히 대기업과 글로벌 브랜드는 소비자와의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마케팅 실수라기보다 기업의 감수성과 내부 검증 체계가 얼마나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정용진 회장의 강경 대응은 이러한 리스크를 조기에 차단하려는 판단으로 해석된다. 다만 대표 해임과 징계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문구가 외부에 공개되기까지는 기획, 검토, 승인 등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특정 개인의 책임을 넘어 조직 전반의 검증 시스템에 허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번 사태는 기업 보안이나 내부통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즉 ‘콘텐츠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최근 기업들은 SNS와 모바일 플랫폼을 중심으로 빠른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짧은 문구 하나로 주목도를 높이고 소비자 반응을 유도하는 전략이 일반화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충분한 검토 없이 민감한 표현이 사용될 경우, 그 파장은 광고 효과를 넘어 기업 신뢰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사안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5·18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민주주의 가치와 직결된 역사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케팅 요소로 소비될 경우 사회적 반발은 불가피하다. 이는 기업이 역사 문제를 더 이상 ‘비영업적 영역’으로 분리해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비판이 빠르게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사회적 파장이 크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신세계그룹이 밝힌 재발 방지 대책—마케팅 프로세스 점검과 내부 교육 강화—방향성 자체는 타당하다. 다만 형식적 조치에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 민감한 콘텐츠에 대한 사전 검토 체계를 강화하고, 의사결정 단계에서 다양한 시각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특히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조직에 대해 역사·사회 이슈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는 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한국 기업 전반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기업 활동이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소비자는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책임과 감수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랜드 가치는 제품이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는 작은 문구 하나로도 흔들릴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예방이다. 이번 조치가 일회성 위기 관리에 그칠지, 아니면 조직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앞으로의 실행에 달려 있다. 역사에 대한 존중이 기업 문화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유사한 논란은 줄어들 것이다.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이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와 감수성을 외면하는 순간 기업의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이 기업들에게 ‘속도보다 기준’이라는 원칙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문제는 다른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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