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국제정세를 분석해 국내외 경제를 전망하는 전문가들에게 지금은 가히 ‘최악의 시대’라 할 만하다. 4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필자에게도 최근의 변동성은 생소함을 넘어 공포스럽다. 밤사이 고뇌하며 써 내려간 분석 보고서가 다음 날 아침이면 곧장 오보로 변해버리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중동 전쟁의 불길이 번진 지난 한 달여, 세계 경제는 우리의 상상력과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4월 12~13일에는 미국·이란 협상 결렬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조치 여파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겼다. 달러 강세, 금리인하 기대 후퇴, 신흥국 성장 둔화 우려도 동시에 커졌다. IMF·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까지 성장률 하향과 물가 상향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예전에는 국제정세와 경제변수가 대체로 순차적으로 움직였다. 전쟁이 나면 유가가 오르고, 그다음 물가가 오르고, 이후 중앙은행이 대응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유 현물시장, 환율, 금리, 재정, 안보 리스크가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호르무즈 긴장으로 현물 원유 가격이 급등하는 동안 달러가 안전자산으로 강세를 보였고, 그 결과 시장은 연준의 금리인하 기대를 줄였다. 심지어 전통적 안전자산인 금값도 강달러와 고금리 전망 앞에서 약세를 보였다. 즉 ‘전쟁 → 유가 상승’이라는 단선적 공식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되지 않는 국면이다.
혹자는 이를 ‘트럼프 복합위기’라는 정치적 수사로 일축하며 특정 인물의 돌출 행동 탓으로 돌리려 한다. 하지만 현상의 본질은 훨씬 깊고 구조적이다. 세계 경제의 혈액인 원유 시장, 주요국의 환율, 금리, 심지어 국가 재정의 건전성마저도 기존의 선형적 예측 모델을 비웃듯 제각각 요동치고 있다. 과거에는 어쩌다 한번 발생하던 극단적인 사건(블랙스완)들이 이제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폴리크라이시스(복합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리, 환율, 재정 정책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한쪽의 구멍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지는 '두더지 잡기' 식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데이터 기술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정보의 과잉과 확증 편향을 낳으며, 시장의 변동성을 실시간으로 증폭시키는 '초가속의 시대'가 되었다.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속도보다 상황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도구들인 전통적 경제 지표(GDP, 물가상승률 등)는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우선 ‘지능의 외주화’를 꼽을 수 있다. AI 에이전트와 자동화가 자본과 노동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지만, 국가의 재정 및 통제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 주요국들의 재정 건전성이 임계치에 도달하면서, 정책 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실상 고갈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요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조차 “(분석과 예측은) 안 하는 게 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 흘러나온다. 장기 전략은커녕 단기 대응조차 임기응변에 급급한 것이 작금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변동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비용 효율성’과 ‘자유 무역’이라는 경제적 알고리즘이 붕괴되고, 그 자리에 ‘지정학적 생존’과 ‘자국 우선주의’라는 안보 논리가 들어앉은 ‘전쟁경제(War Economy)’의 서막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국가가 내놓는 정책은 무엇보다 ‘방향타’가 선명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정책 대응은 극단적인 이분법에 갇혀 표류하고 있다. 금리나 환율을 만지는 거시(Macro) 담론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체감되지 않고, 소상공인이나 개별 가계를 핀셋 지원하는 미시(Micro) 정책은 거대한 파고를 막아내기엔 그 규모와 범위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양극단을 잇는 ‘메조(Messo) 경제’의 복원이다. 메조 경제란 특정 산업 생태계, 지역 공동체, 혹은 에너지·교통·데이터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 단위를 일컫는다. 거시 경제의 충격이 미시 경제의 파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관절’이자 ‘방파제’와 같은 영역이다. 신뢰가 붕괴된 국제 사회에서 정책 당국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세상은 요동쳐도 우리의 핵심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바로 이 메조 경제를 얼마나 단단하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중동 위기 극복을 위해 편성한 26조2000억원 규모의 비상 경제대책(추경 중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정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과거의 관성적 문법으로 접근해서는 백약이 무효이다. 이번 추경의 용처는 ‘전쟁경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메조 단위 시스템을 수리하고 보강하는 ‘전략적 방패’가 되어야 한다.
첫째, 에너지 메조 시스템의 안정화다. 유가 폭등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다. 그러나 이 리스크가 물류망을 마비시키고 서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은 메조 단위에서 차단할 수 있다. 이번 추경에 포함된 에너지 바우처와 유가 보조금 확대는 단순한 현금 지원이 아니다. 우리 경제의 혈맥이 굳지 않도록 하는 ‘항응고제’ 처방이며, 공급망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둘째, 비용 구조의 혁신을 통한 생활 인프라 보호다. 대중교통 K-패스 확대나 석유 최고가격제 관련 예산은 가계 부채라는 미시적 난제와 고물가라는 거시적 난제 사이에서 ‘교통’과 ‘에너지’라는 중간 인프라 비용을 낮춰 실질 소득을 보전하는 효과를 낸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의 저지선을 메조 단위에서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 산업 생태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 강화다. 특정 부품이나 원자재가 막혔을 때 개별 기업이 각자도생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 전체가 버틸 수 있도록 피해 기업 손실 보전과 수출 금융 지원을 결합해야 한다. 이는 기업에 주는 특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수출 네트워크라는 메조 자산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은 예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꿨다. 그들은 예산을 ‘위기 관리 투자’와 ‘성장 투자’로 명확히 구분하되, 이를 일체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의 위기 관리 투자는 식량, 에너지, 의료, 사이버 보안 등 사회 전반의 리스크에 관민이 협력하여 선제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전략이다.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국민 생활의 안정을 지키는 ‘방패’를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AI, 반도체, 항공·우주 등 첨단 기술에 투자하는 성장 투자를 통해 이 방패를 ‘창’으로 바꾼다. 위기 관리를 통해 확보된 ‘억지력’과 ‘회복탄력성’이 기업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미래 기술에 투자하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추경 역시 이러한 ‘안보-성장 일체형’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에너지 위기 대응이 단순히 고통을 분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술 투자나 공급망 재편으로 이어지도록 예산의 용처를 정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일본이 다년간의 별도 예산 체계를 도입해 재정 규율을 유지하면서도 성장을 도모하듯, 우리도 추경이 단발성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관리 체계를 고도화해야 한다.
지금 정책 당국자들에게 ‘신뢰’라는 단어는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당장 내일 유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신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는 평시가 아닌 위기 시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는 것은 정부가 미래를 완벽히 맞추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폭풍 속에서도 정부가 내 삶의 기본값을 지켜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당국은 이제 거시 지표의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임기응변에 매달리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은 위험 속에서도 길을 내는 작업이다. 정책 당국은 거시와 미시를 잇는 메조 경제의 컨트롤타워로서, 이번 추경 26조2000억원을 우리 경제의 관절을 튼튼히 하는 ‘골든타임의 수술비’로 써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의 진통을 겪고 있다. ‘신뢰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신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정책 역량을 총동원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역발상의 시대다. 전쟁경제의 파고는 높고 기존의 경제 이론은 무력해졌지만, 우리 경제의 허리인 메조 단위를 보강하고 일본의 전략적 사례처럼 위기 관리와 성장을 하나로 묶어낸다면, 이 위기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거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추경 예산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겨내는 단단한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는 이미 지정학, 에너지, 금융, 재정이 하나의 통합 시스템처럼 반응하는 단계로 들어왔고, 그 결과 전통적 거시전망의 수명이 짧아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망의 정확도보다, 충격이 왔을 때 얼마나 빠르게 가정을 수정하고 정책·포트폴리오를 바꾸느냐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무너진 예측의 자리에 확고한 정책적 신뢰가 다시 들어차는 것, 그것이 이 가혹한 시대를 건너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정공법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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