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李宗勳)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4월 3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부에서 전력과 원자력이라는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켜 세운 1세대 기술 관료이자, 한국 엔지니어링 정신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곧 전력망의 확장과 원자력 기술의 도입, 그리고 국가 산업 기반의 구축이라는 현대 한국사의 압축된 서사였다.
고인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농림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봉직하며 젊은 시절부터 국가와 기술을 함께 고민하는 길을 걸었다. 1960년대 초, 한국전력의 전신인 조선전업 공채 1기로 입사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산업 현장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전력은 국가 경제의 토대이자 동시에 가장 취약한 기반이었고, 전력난은 곧 국가 경쟁력의 한계를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원자력건설처장과 고리원전 본부장을 거치며 한국 원자력 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특히 고리원전 건설 과정은 단순한 설비 도입이 아니라, 기술 자립과 인력 양성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였다. 이종훈은 이 과정에서 현장을 지키며 기술과 행정을 결합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원전은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라 미래 산업의 기반이라는 확신이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녹아 있었다.
이후 한국전력 부사장을 거쳐 한국전력기술 사장을 역임한 그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1대 한국전력공사 사장으로 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한국 전력산업이 양적 확대에서 질적 전환으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전력 공급의 안정성 확보와 함께 효율성, 기술 경쟁력, 그리고 국제 협력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조직의 체질을 바꾸고 기술 중심 경영을 강화하며 한국 전력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고인은 한국원자력연구소 이사장, 한국프로젝트경영협회 창립회장, 대한전기협회 회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한국원자력산업회의 회장, 한국공학한림원 창립 이사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이는 단순한 직함의 나열이 아니라, 한국 공학과 산업 생태계의 틀을 설계하고 확장해 온 과정이었다. 특히 한국공학한림원 창립 이사장으로서 그는 공학자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공로는 다수의 상훈으로 이어졌다. 1983년 은탑산업훈장, 1994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해 한국능률협회 한국경영자상(1996), 에디슨상(1997, 아시아 최초 수상), 한국공학한림원 대상(2007), 한국전기문화대상(2008), 한국원자력대상(2018) 등은 그가 걸어온 길의 무게를 보여준다. 특히 에디슨상 수상은 한국 엔지니어링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저술 활동에서도 그는 기술과 인문을 잇는 통찰을 남겼다.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강국이 되었나’에서는 산업 정책과 기술 축적의 과정을 정리했고, ‘만년에 한시에 탐닉하다’에서는 공학자의 삶을 넘어선 인간적 성찰을 담아냈다. 이는 기술자가 단지 기계를 다루는 존재가 아니라, 시대를 읽고 사유하는 지식인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종훈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기본’과 ‘축적’이었다. 그는 단기간의 성과보다 장기적 기반을 중시했고, 외형적 성장보다 내실 있는 기술 축적을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 전력 인프라와 원자력 기술을 갖추게 된 배경에는, 이름 없이 현장을 지키며 기초를 다져온 세대의 헌신이 있다. 이종훈은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전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그의 삶 역시 그러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보이지 않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산업화의 격랑 속에서 기술과 국가를 연결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토대를 남긴 그의 여정은 이제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며, 대한민국 산업의 근간을 세운 한 공학자의 삶을 깊이 기린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