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최근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언론과 투자 리포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AI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시장의 반응과 기술 변화를 동시에 살펴보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징후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AI 도구 등장 이후 급격히 흔들리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기존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Software as a Service) 모델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특정 기업의 경쟁력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다. AI가 소프트웨어의 역할 자체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소프트웨어는 인간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메뉴를 선택하며,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생성형 AI와 에이전트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작업 수행의 주체가 사용자에서 AI로 이동하고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을 조작하지 않는다. 의도를 표현하면 AI가 여러 시스템을 가로질러 작업을 완결한다. 이는 인터페이스의 변화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준이다.
이 변화가 특히 두드러지는 영역은 ‘앱의 경계 붕괴’다. 기존 디지털 환경에서 기업은 CRM(고객 관계 관리), ERP(전사적 자원관리), 협업툴, 분석툴 등 다양한 SaaS를 별도로 도입해 사용해 왔다. 각 애플리케이션은 독립된 기능 묶음을 제공했고,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 간 이동을 전제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는 이러한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하나의 명령으로 데이터 조회, 문서 작성, 고객 응대, 일정 조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기능은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 단위로 소비되지 않는다. 필요 기능이 작업 흐름 속에서 동적으로 호출된다. 다시 말해 실행 시점에 필요한 작업을 지능적으로 선택·추론해 호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언번들링(unbundling)’ 현상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글로벌 기술기업 전략과 시장 구조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기술기업들은 기존 소프트웨어 기능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애플리케이션 자체의 필요성을 줄이거나 업무 수행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를 별도의 제품군이 아니라 기존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에 통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애저(Azure) 클라우드와 협업 도구, 개발 환경에 AI 모델을 결합하면서 AI 관련 서비스가 플랫폼 수익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실제로 애저 매출은 AI 수요에 힘입어 높은 성장세를 보였고, 코파일럿 계열 서비스는 2026년에는 플랫폼 매출의 40% 이상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제조업 현장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통해 데이터 조회와 의사결정을 자동화하면서 유지보수 사고 감소와 생산성 개선을 달성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방향으로 AI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AI 투자를 통해 연산 인프라와 모델 생태계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으며, 자체 AI 칩 개발로 비용 구조까지 재편하고 있다. 한편 AWS는 파트너십을 통해 AI 모델 공급망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업 업무 자동화를 위한 AI 에이전트 환경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앤스로픽과의 전략적 협력 및 투자 확대는 클라우드 고객이 단순한 데이터 분석 도구가 아니라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AI 시스템을 직접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런 흐름은 SaaS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클라우드 기반 AI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가속한다.
AI 확산은 특정 기업 전략을 넘어 시장 전반의 구조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공급업체 수를 줄이고 AI 도구로 동일 업무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평균 SaaS 사용 애플리케이션 수 감소와 공급업체 축소가 진행되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여러 단계 업무를 자동으로 수행할 경우 한 사람이 다수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좌석 기반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구조가 형성된다.
생산성 도구 영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AI 도입을 통해 기존 CRM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거나 대규모 조직 운영 소프트웨어 인력 구조를 축소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으며, 향후 SaaS 좌석(사용자/계정) 수가 두 자릿수 비율로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클라우드 운영 영역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자원 배치와 비용 관리까지 자동화하는 플랫폼이 등장하며 기존 관리 소프트웨어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주거·의료 운영 분야에서는 일정 조정, 청구, 유지보수 요청 처리 등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AI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으며 과금 방식 역시 사용자 수가 아닌 관리 자산 규모 기준으로 변화하고 있다. 개발 영역에서는 AI 코딩 도구가 반복적 프로그래밍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며 생산성 도구 자체가 AI 기능에 흡수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는 SaaS의 핵심 수익 모델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SaaS 산업은 좌석 기반 과금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사용자 수가 늘수록 매출이 증가하는 구조다. 하지만 AI 자동화가 확산되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업무를 수행하거나 일부 역할 자체가 사라진다.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일부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축소하거나 도입 계획을 재검토하는 사례가 보고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또 다른 구조적 충격은 진입장벽 붕괴다. 과거에는 복잡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 구축에 대규모 개발 조직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AI 개발 도구는 기능 구현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있다. 소규모 팀이 짧은 시간 내 기존 SaaS 기능을 재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제품 희소성이 약화되고 가격 결정력도 떨어지고 있다. 산업 전체가 과잉 경쟁 상태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프트웨어 붕괴’라는 표현은 완전히 근거 없는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는 일이다. 소프트웨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더 많이 필요해진다. 변화하는 것은 전달 방식과 경제 모델이다. 애플리케이션 접근권을 판매하던 구조가 결과 수행 능력을 제공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이 전환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살펴보면 복합적인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소프트웨어와 AI 핵심 스택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GPU(그래픽 처리 장치), 클라우드 인프라, 핵심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등 주요 구성 요소 상당 부분을 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AI 질서가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형성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자율성 확보는 쉽지 않은 과제다. 독자 모델 개발 시도 역시 외부 기술 의존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중요한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의 AI 도입 속도는 매우 빠르며 제조,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물리 산업 기반 데이터 자산이 풍부하다. 이는 범용 모델 경쟁에서는 불리할 수 있으나 산업 특화 AI에서는 강력한 경쟁력을 제공한다. 또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역할과 AI 인프라 투자 확대는 중장기 전략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기술 완전 자립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전략적 자립을 추구해야 한다. 범용 컴퓨팅 자원은 글로벌 협력을 활용하되 특화 영역에서는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이중 구조 접근이 현실적이다. 둘째, 초거대 모델 경쟁에 집착하기보다 산업 AI에 집중해야 한다. 제조, 로봇, 물류 등 실제 물리 시스템과 결합된 AI는 진입장벽이 높고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오픈소스 생태계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술 접근성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중견국(미들파워) 전략이다. 넷째, 컴퓨팅 인프라 투자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AI 시대의 주권은 데이터나 모델뿐 아니라 연산 능력에서도 결정된다. 다섯째, 소프트웨어 수출 전략을 재정의해야 한다. 애플리케이션 판매 중심에서 운영 서비스, 통합 관리, AI 오케스트레이션 제공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AI가 촉발한 변화는 단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산업 패러다임 전환이다. 앱 중심 구조에서 작업 수행 중심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기존 경쟁 구도는 크게 재편될 것이다.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창도 열리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중심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었던 국가가 실세계 시스템 통합과 산업 AI 영역에서는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위기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소프트웨어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의 순간마다 새로운 산업 질서가 형성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한국이 이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중 하나가 될 것인지는 지금의 전략 선택에 달려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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