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국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최종 결정자인 대통령은 언제나 고독한 결단자이다.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 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헌법 제68조 제1항). 대통령에 당선되면 취임하기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과도기적인 준비기간을 거친다. 이 기간에 대통령 취임 이후 국정 방향을 준비하는 인수위원회가 가동된다. 그런데 87년 체제에서 두 번이나 당선 즉시 대통령에 취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대통령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어 윤석열 전 대통령도 4월 4일 파면되었다.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헌법 제68조 제2항).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6개월이 지난 2025년 6월 3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이재명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87년 체제에서 벌써 다섯 번째 여야 간 수평적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대통령만 취임했을 뿐 대통령실이든 행정부든 새 대통령의 인사는 취임 시점에 아무도 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대통령실이 필기구조차 없이 통째로 비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불기피한 비상상황이다. 결국 어공들은 자취를 감추지만 파견근무하던 직업공무원들에 대한 출장 형식의 원대복귀로 겨우 살림을 꾸린다. 취임 직후 대통령은 비서실장 임명에 이어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했다. 총리와 국무위원이 새로 취임하기까지는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대통령과 전 정부 국무위원의 불편한 동거가 지속된다. 대통령 취임 후 20일 만에 겨우 10개 부처 장관 후보자를 지명하고, 1명의 장관은 유임시켰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제87조 제1항). 정권교체기에는 과도기적으로 전 정권의 국무총리가 새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형식적으로 국무위원을 제청한다. 이번에는 국무총리와 제2순위 대통령 권한대행인 경제부총리까지 자진 사퇴함에 따라 제3순위 권한대행인 사회부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연출되었다. 정상적으로 정권이 교체될 경우에도 별반 차이가 없다.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과 국회법에서는 대통령 당선 후 취임 전에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후보자의 인사청문이 가능하도록 새로 규정을 도입하였지만 현실은 이를 잘 따르지 못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도 퇴임할 김부겸 총리가 국무위원을 추천하기도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명된 지 21일 만에 인사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인사청문회가 개최되면 언제나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요구가 자료 제출 미비이다. 자료 제출 요구 건수가 수백 건에서 많게는 1000건에 이른다. 이제 자료 제출도 꼭 필요한 부분 외에는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여당 의원은 후보자 엄호에 몰두한다. 여당 청문위원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다. 반면 야당은 후보자 흠집 내기에 몰두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나라에서 살다보면 흠결 없는 후보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결정적인 흠이 발생하면 후보를 사퇴하는 게 순리다. 현 정부에서도 비록 인사청문 대상은 아니지만 여론의 따가운 질책에 따라 초대 민정수석이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낙마하지 않았는가. 김민석 청문회 과정에서 공수가 바뀐 여야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한덕수 초대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자주 인용한다. 김민석과 한덕수 두 총리에 대한 비교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첫째, 전적으로 상이한 두 분의 인생역정이다. 한 전 총리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 경제 관료다. 언제나 성실하고 열심인 일중독(Workholic)형이라 산업화 시대에 공부하는 관료의 전범으로 통한다.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한 모범생이다. 87년 체제에서 고건 총리에 이어 두 번이나 총리를 역임하였다. 특별한 백그라운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능력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부총리, 총리, 주미대사 등 어느 누구도 그 화려한 경력을 따라가기 어렵다. 공무원을 하면서 하버드대 경제학박사까지 취득했다. 오래전 ‘한국경제신문’은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인사로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과 더불어 한 전 총리를 첫 손가락에 꼽았다. 지금도 두 개의 영문 일간지를 구독하면서 매일 영어 관용구를 공부하는 그야말로 성실근면형이다. 반면에 김 총리는 엄혹한 5공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의 기수를 자처했다. 3년의 옥고는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훈장 아닌 훈장이다. 민주화 이후에는 야당의 스타 청년 정치인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1996년 촉망받는 젊은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최연소 집권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하면서 정치적 격랑을 거친다. 2002년 재벌 2세 정몽준 대선 후보 캠프에서 실패하고 총선에서도 낙선하면서 긴 낭인 생활을 보내야 했다. 미국도 다니고 중국도 다니면서 수학과 견문을 넓혔다. 미국 변호사 자격도 취득하고 칭화대 석사 학위도 받았다. 5년 전 21대 국회의원으로 입성하면서 새로 재조명받는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긴 공백기의 불행한 가정사와 생활비 조달 등으로 청문회에서 발목이 잡혔다. 실직 상태에서의 고달픈 경제적 삶이 아쉬움을 남긴다. 그나마 재산이 채 2억원도 되지 않는 가난한 국회의원 반열이라 흠집이 넘어갈 여지를 준다.
셋째, 이제 한 전 총리 시대는 가고 김 총리 시대가 열린다. 민주화 투쟁과 3년에 걸친 옥고, 18년 낭인생활의 역경을 이겨낸 김 총리가 새 시대를 개척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총리는 조선시대로 치면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재상 격이다. 그런데 그간 총리의 존재가 너무 미약했다.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 총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연령상으로 한 전 총리는 띠 동갑 후배 대통령 밑에서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런데도 선배답게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김 총리는 대통령과 동갑내기에 같은 학번이다. 때로 스스럼없이 대화도 하고 때로 친구 대하듯 당돌하게 맞대응할 수도 있기를 기대한다. 김 총리의 취임 일성은 ‘새벽 총리’다. 그간 흐트러진 국정을 새벽같이 일어나 혼신을 다해 다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스스로 대통령의 ‘최고참모장’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총리는 정부의 제2인자이긴 하지만 대통령의 참모가 아니라 국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여야 한다. 헌법 86조에서 반드시 국회의 임명동의를 요구하는 이유를 곰씹어보아야 한다. 헌법상 총리는 대통령과 국회의 이중 신임에 기초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역사상 그 어느 총리도 대통령의 참모장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참모장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내에서 견제와 균형의 축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 대통령이나 김 총리 모두 육십 이순 환갑을 넘은 나이다. 이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두 분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활짝 열어가길 기원한다. 산업화 시대에 소년공으로서 궁핍한 경제를 직접 체득한 대통령이기에 경제 문제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성과를 기대한다. 배를 고파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배고픔을 안다. 그런 점에서 산업화의 신화를 이룬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철학은 이 대통령에게도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박정희 정책이나 김대중 정책도 구별 없이 쓸 것”이라는 실용주의 취임사에 국민적 기대가 크다. 김 총리는 배고픈 청년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쏟아부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 열정과 민주화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로서 성공한 총리의 길을 가야 한다. 동년배이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분, 산업화의 마지막 수혜자인 대통령과 민주화의 기수인 총리의 결합은 전례 없는 환상의 콤비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저물어가는 87년 체제에서 두 분이 새로운 제7공화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대통령과 총리가 되어야 한다(성낙인, 87년 체제의 종언과 제7공화국, 나남, 2025).
무엇보다 고질적인 ‘제왕적 대통령제’의 틀을 벗어나려면 대통령이 총리를 존중하고 총리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주변에는 언제나 부나방들이 설치고 자칫 대통령의 귀와 눈을 흐리게 할 우려가 상존한다. 총리는 자칫 야기될 수 있는 대통령의 오판을 제어할 수 있는 최고의 공인이어야 한다. 더구나 국회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부이다. 비상계엄으로 상처 난 국민들을 위무하고,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의 부활과 착근의 구현은 이재명 정부에 부여된 역사적 숙명이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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