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향한 국민적 열망은 1960년 4월 학생혁명에 이어 1987년 ‘6월항쟁’으로 귀결된다. 광장의 시민들은 ‘직선쟁취’를 연호한다. 마침내 여야 ‘8인정치회담’의 합의에 따라 87년 헌법 체제가 정립된다. 헌법이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되어 흠결과 상처를 남긴다. 그래도 민주적 합의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정착을 열망하던 국민적 요구는 그 첫발부터 삐거덕거린다. 민주화의 화신인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은 결국 12·12와 5·18 군사정변의 2인자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진다. 허망한 결과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87년 체제에서 3당 합당,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 등 혼돈과 여진은 계속된다. 여당 내부의 갈등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파국을 맞이한다. 시민들은 다시 광장으로 집결한다. 탄핵은 헌재에서 기각되지만 그 여진은 남는다. ‘탄돌이’의 승리는 오히려 정권의 몰락을 재촉한다. 청계천 복원으로 대통령에 오른 이명박은 광장의 광우병 함성에 혼비백산한다. 후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측근 비리 오명으로 광장의 희생자가 된다. 탄핵인용으로 파면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탄핵 여파로 집권당이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문재인 후보는 손쉽게 정권교체를 이룬다. 하지만 자신이 임명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한 채 등을 돌린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내몰린다. 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이명박·박근혜의 10년 주기 정권교체는 5년으로 단축된다. 하지만 극단적인 여소야대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대통령은 결국 파국을 자초한다. 2024년 12월 3일 엄동설한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비상계엄 선포로 정국은 혼돈에 빠진다. 정치검찰 수준으로는 정치가 안 된다. 두 번째 탄핵인용으로 대통령은 파면된다. 마침내 2025년 6월 3일 대선에서 3년 전 불과 0.73% 차이로 패배한 이재명 후보가 사상 최다 득표로 당선된다. 전 세계 대통령제 국가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 번의 탄핵소추를 겪으면서 한국형 대통령제의 정착을 염원한 87년 체제는 종착역에 이른다.
이제 광장의 민심을 국정으로 연결해야 하는 새 대통령 앞에는 축하만 하기는 너무나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남북 분단도 서러운데 남남갈등이 양극단에 이른다. 계층, 지역, 세대, 젠더, 빈부 등 켜켜이 쌓인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늘 화합과 통합을 강조한다. 정작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아독존의 성채를 쌓아간다. 이제 전임자들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행동으로 진심을 보여야 한다. 취임사에서 ‘모든 국민의 대통령’임을 강조한 바와 같이 ‘정의로운 통합정부’를 기대한다. 그 정의는 일찍이 키케로가 적시한 바와 같이 ‘각자에게 그의 것을’ 충족하는 정의여야 한다.
둘째, ‘먹사니즘’은 이 대통령의 창작이념이다. 인간의 삶의 기본적 수요는 의식주다. 소년공으로 먹고사는 문제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분이라 누구보다도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책을 강구하길 기대한다. 취임사에서 ‘실용적 시장주의’를 강조한다. 이 대통령이 보여준 경제정책 중에서 일부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사법 리스크가 있음에도 국민들은 민생문제 해결의 적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 시대에 세계경제는 혼돈을 거듭한다.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로 상징하는 극단적인 자국이기주의가 팽배한다. 한국은행조차 경제성장을 1% 미만으로 사상 최저를 예측한다. 수출입국(輸出立國)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은 위기에 봉착한다. 마이너스 수출에 직면한다. 시내 곳곳에 빈 점포가 넘쳐난다. 자영업자들은 1997년 IMF 환란 때보다 경제가 더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인권탄압과 장기집권으로 몰락하였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추앙한다. OECD 국가에서 유일하게 부녀(父女) 대통령이 탄생한 이면에는 산업화를 성공시킨 ‘경제 대통령’이 자리 잡는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구별 없이 쓸 것"이며 "진보·보수 없다.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남미의 민주화 과정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드문 이유도 간단하다. 백성들은 굶주리게 해 놓고 포퓰리즘으로 쌓아 올린 그들만의 성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광활한 자원대국 브라질·아르헨티나나 산유국 베네수엘라의 실패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국을 등지고 미국과 유럽으로 향하는 남미와 중동의 이민행렬은 정치지도자들이 국민들의 ‘먹고사는’ 생존 문제를 책임지지 못한 결과다. 20세기를 반분한 자유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인민민주주의의 파탄도 결국은 경제 실패에서 비롯된다.
넷째, 정치도 문제다. 국무회의는 헌법상 최고의 정책심의기구이다. 그런데 토론은커녕 대통령실의 주문을 통과시키는 거수기로 전락한다. 국정 현안 논의의 중심축에 국무회의가 자리 잡아야 한다. 책임 내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실보다는 내각에 힘이 실려야 한다. 대통령실은 최소한의 조직으로 국정의 핵심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내각은 이를 실천하는 구현자여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고 대화하느냐에 따라 각기 위상이 달라진다. 청와대 참모에만 의탁하지 말고 총리, 내각과 널리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보의 편식을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의 오판은 자칫 국가적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가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취임한 대통령의 첫 인사는 지인 중심으로 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향후 적재적소에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인사를 통해서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인사가 만사다.’ 국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대통령은 입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취임하자마자 국회는 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발의한 내란·김건희·채상병 3특검법을 통과시킨다. 특검에 차출되는 검사는 120명이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천지검 검사보다 더 많다(검사 현원 2004명, 서울중앙지검 216명, 인천지검 115명). 특검이 정치보복의 서막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검찰 수사권 박탈을 주창하면서 특검 수사검사 차출은 자가당착에 처할 수 있다.
다섯째, 탄핵 후유증도 하루 빨리 수습해야 한다. 직전 대통령의 내란죄 재판이 진행 중이고, 국무총리·국무위원과 고위 군경 관계자가 동시에 연루되어 있다. 내란 문제에서 자유로운 이 대통령이 자칫 내란 논란에 휩싸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가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법원이 결단을 내리고, 야당도 화합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적 정당성을 담보한 대통령에 대한 재직 중 사법절차 진행은 적절치 않다. 재판은 퇴임 후에 재개되어도 늦지 않다. 취임 후 재판 중단을 입법화한 2007년 프랑스 헌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성낙인, 헌법학 제25판, 571면). 특히 대통령은 법원과 검찰을 비롯한 형사사법체계의 개혁을 강조한다. 그 개혁은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서둘러도 안 된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 실패는 좋은 반면교사다. 대법관을 14명에서 30명으로 파격적으로 증원하려 한다. 재판 지체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일리가 있다. 진보·보수 정권에서 각기 사법개혁안을 제시한 바 있다. 상고법원이 아니라면 대법원에 대법관과 일반법관의 이원화가 필요하다. 검수완박(檢搜完剝), 즉 검찰의 수사권 박탈도 현안 과제다. 공수처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기소청 전환도 신중해야 한다. 공수처는 이상적인 제도일지라도 현실 적응성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왜 OECD 국가에서 공수처와 같은 조직을 도입하지 않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제도의 기본틀을 벗어나는 예외적인 기관의 설치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시행령 통치의 산물인 행안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관리단 폐지는 적절한 조치다.
여섯째, 무엇보다 갈등과 한계를 드러낸 87년 체제를 정리하고 새롭게 헌법의 틀을 짜야 한다. 대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후보자들이 개헌을 약속했다. 새 헌법은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하고 통일시대까지 대비하는 헌법이어야 한다. 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개헌안을 제시한 바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정부 발의 개헌안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되었지만 민주당 정부 차원에서 계승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정회·한국헌법학회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에서도 개헌안을 제시한다. 그 내용은 한결같다. 제왕적 대통령은 실패했으므로 권력분산형 대통령제든 이원정부제든 간에 대통령의 권력 독점은 안 된다. 결론은 간단하다.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 간 국정 파탄이 아니라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가 동반자여야 한다. 이를 위해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국회의 신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헌법규범으로 명시해야 한다. 헌법이 곳곳에 안고 있는 흠결도 보정해야 한다. 방탄복·방탄유리와 함께한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대통령 선거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성낙인, ‘후보단일화와 프랑스헌법의 교훈’, 한국일보 2025.5.28). 격변하는 AI시대에 세계화·정보화·지방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헌법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겸손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국민이다(헌법 제1조). 세입자가 주인 노릇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직에만 오르면 권위적으로 돌변해온 전임자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취임식 직후 여성 청소원을 안아주던 자상한 모습과 따뜻한 마음이 5년 내내 변치 않아야 한다. 현충원 순국선열 앞에서 맹세한 바대로 진정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큰 귀’를 가지고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칭찬과 아부에 영합하지 말고, 쓴소리도 경청해야 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를 경계해야 한다. ‘선출된 군주(elected monarch)'로 군림할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낮은 자세로 국정에 임하길 기대한다. 87년 체제에서 마지막으로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과 대한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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