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중반 영국은 장기간의 전쟁과 재정 압박에 시달리자 은화(銀貨) 함량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겉은 같은 은화지만 합금을 섞어 은 함량은 이전보다 크게 낮아졌다. 이를 알게 된 국민들은 고순도의 '진짜 은화'를 보관하거나 외국으로 유출시키고 질 낮은 은화만 시장에서 사용했다.
영국 금융업자인 토머스 그레셤은 재정 회복을 도모하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 이 상황을 경고했다. "불량한 화폐는 양질의 화폐를 몰아냅니다." 훗날 이 이론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단문으로 퍼져 '그레셤의 법칙'으로 명명됐다.
500여 년 전의 통화 교환 원리는 오늘날 디지털 자산 생태계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통화 실험이 한국에서 논의되는 지금, 시장에서는 신뢰에 기반한 스테이블코인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코인들이 먼저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는 명확하지 않은데 정치권이 이를 뒷전으로 미룬 탓이다.
한국에서 실제 거래되는 일부 스테이블코인은 외형만 안정된 화폐일 뿐 준비금 증빙이 없거나 담보 자산이 불분명한 것이 많다. 알고리즘 기반으로 발행되면서 변동성을 방치하고, 발행 주체의 재무 건전성조차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통되는 식이다.
이러한 '악화'가 시장에서 유통되는 동안 투명한 감사 체계와 합법적 라이선스를 갖춘 양질의 프로젝트들은 위축되거나 아예 한국 시장 진입을 포기하고 있다. 결국 신뢰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구조적 리스크가 높은 코인이 시장을 점유하는 기형적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금융 생태계가 구축되는 현 상황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기술적 도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시스템의 일환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에서는 조기 대선을 앞둔 최근 보름 사이 갑자기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직전까진 자금세탁방지 의무와 일부 형식적 요건 외에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정의나 기준조차 세우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률적으로도 가상자산법·자본시장법·전자금융거래법 어디에도 명확히 속하지 않은 '그레이존'에 머물러 있다. 그러는 동안 책임 소재는 분산되고 제도적 공백이 커지면서 '악화'는 더욱 자유롭게 유통됐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정책적 정의가 없으면 시장은 계속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자산을 넘어 송금·결제·저축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하루빨리 어떤 법적 지위로 규정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정부는 △발행 요건 △준비금 검증 △회계 투명성 등 기준을 명확히 하고, 양질의 프로젝트가 제도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져야 한다. 동시에 불량 프로젝트에 대한 퇴출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질서다. 디지털 경제 시대에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거대한 흐름에서 한국이 규제 공백과 관료적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그레셤의 법칙은 경고한다. 지금의 악화를 방치하면 양화는 곧 사라진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화가 구축되도록 돕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양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 질서를 설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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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2025-06-04 06:45:03나쁜 스테이블 코인 반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