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며, 거리에는 어김없이 유세 차량의 음악과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율동과 구호, 피켓이 난무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유세의 핵심은 후보 이름 알리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정책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TV 토론에서도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비전과 정책 논의는 실종되고,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과 정쟁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처럼 표심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유세가 반복될 때, 국민의 기대는 냉소로 바뀌고, 정치에 대한 신뢰는 한층 더 약화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불안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신뢰의 구조적 붕괴’이다. 이는 국가의 정당성, 공공정책의 효과, 사회 공동체의 연대감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2025년 대선은 단지 다음 대통령을 뽑는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신뢰 체계를 재건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첨단기술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시스템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신뢰의 부재다.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그 기술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사회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올해 초 발생한 SK텔레콤 유심(USIM) 해킹 사건은 이러한 신뢰 기반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스마트폰 하나로 은행, 결제, 공공인증까지 연결된 시대, 디지털 보안은 곧 국민의 안전이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와 기업은 데이터 수집과 활용에는 열을 올리면서, 보관과 보호에는 투자와 고민을 게을리해 왔다. 그 결과, 2025년 1월부터 4월까지 확인된 개인정보 유출 건수는 3,680만 건,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70%가 증가했다.
이제는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물음에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다. 통신사도, 금융기관도, 플랫폼 기업도 법적 책임만을 따지며 발을 빼고 있다. 국민은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구조 속에 고립되어 있으며, 사회적 신뢰 시스템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과학과 의학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킨 계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은 ‘정치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방역정책에 대한 여야 간의 논쟁, 백신 도입과 접종 방식에 대한 정치적 프레임은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고, 과학자와 전문가에 대한 신뢰는 타격을 입었다. 정부는 R&D 예산 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계 카르텔’ 프레임을 활용했고, 이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치명적인 낙인이 되었다.
올해 1월 발표된 스위스 취리히대·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자 신뢰도는 조사 대상 68개국 중 50위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78%가 과학자를 ‘전문가’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정직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57%, ‘공공의 안녕을 염려하는 존재’라는 평가는 56%에 그쳤다. 이는 과학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수치다. 특히 가짜뉴스와 잘못된 정보의 확산은 과학에 대한 신뢰를 더욱 갉아먹고 있다. 정확한 정보보다 자극적인 루머가 더 빠르게 퍼지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진실을 확신하지 못한다.
과학뿐만이 아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의료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2024년 스태티스티카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31개국 중 의사 신뢰도가 최하위를 기록했다. 한때 팬데믹 시기 영웅으로 불리던 의사들은 의대 증원 갈등 국면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낙인찍혔고, 국민의 분노는 의료계 전체로 향했다. 물론 의료계에도 성찰과 개혁이 필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료인에 대한 신뢰 자체가 붕괴된 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다. 학생이 가장 의지해야 할 담임교사에 의해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민원에 시달린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은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교사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감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학생 중심’이라는 교육 정책은 종종 교사를 소외시키고, 그 결과는 교사와 학생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사법 신뢰도 역시 위기다. 통계청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법원에 대한 신뢰는 46.1%, 경찰(50.8%)보다도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최근의 정치 사건 판결과 판사 성향 논란, 폐쇄적인 재판 시스템에 대한 불만은 법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고 있다. 정의를 기대하지 못하는 사법제도는 더 이상 국민을 보호할 수 없다.
이처럼 사회 전 분야에서 신뢰의 토대가 붕괴되고 있는 지금, 대선 후보들은 단순한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공약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다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 신뢰는 국가 경쟁력의 근본이며, 정책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이번 대선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이렇듯 혼란한 사회적 불신 속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제안하고 고민하고 있는지. 무분별한 정치화와 낙인찍기를 멈추고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과학기술·의료 전문가를 파트너로 대우하고 이들의 정책적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정보 유출 및 기술 해킹 사태에 대응할 국가 디지털 안전위원회를 통한 기술 기반 공공 신뢰 회복을 위한 종합적인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인기를 끈 한 의학 드라마가 방송 종료 이후에도 오랜 여운을 남겼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완성된 전문가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돕고 성장해가는 ‘아마추어’의 모습이었다. 그 안에는 열정, 진정성, 인간적인 결함,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살아간다는 신뢰’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였다. 국민도, 정치인도, 전문가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서로를 믿고자 하는 노력,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세우는 의지가 있다면 사회적 신뢰는 회복될 수 있다.
이번 대선이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기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퍼포먼스보다 정책으로 말하며, 정쟁보다 신뢰 회복에 앞장서는 후보가 선택받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우리가 다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다.
김재영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고려대 경영학 박사 ▷한국정보시스템학회 이사 ▷4단계 BK21 융합표준전문인력 교육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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