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돋보기] '태종 이방원'으로 드러난 퇴역 경주마들의 '마생(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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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기자
입력 2022-01-2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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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서 낙마 촬영 뒤 사망한 말은 은퇴 경주마 '까미'

  • 죽어라 달렸던 경주마들, 그 끝은 '도축장'…2019년 美 동물보호단체가 폭로

  • 동물자유연대 "미디어 내 동물 관련 가이드라인 수립하고 준수 촉구할 것"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가 1월 21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주마로 활동하다 은퇴한 말 한 마리가 목이 꺾인 채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한 드라마에서 낙마 장면을 촬영하다 생긴 일이다. 제작진은 말 앞발에 줄을 묶은 뒤 달리던 말을 강제로 쓰러뜨리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해당 장면은 동물 학대 논란으로 불거졌지만, 제작진은 말 외견상 부상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 말은 일주일 뒤 사망했다. 인간의 오락 수단으로 평생을 달려온 말이 죽기 직전까지 유희를 위한 소품으로 쓰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24일 동물보호단체 등에 따르면 동물권보호단체 '카라'가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장 책임자를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도 드라마 제작진이 말을 강제로 넘어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영등포경찰서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가 1월 21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앞서 이 드라마 7회에는 이성계가 말을 타고 가다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말 몸체가 90도 가까이 뒤집히는 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컴퓨터그래픽(CG)을 이용한 촬영 기법으로 인식했다. 동물을 실제로 넘어뜨려 연출한 장면일 경우 가혹한 학대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시청자들의 예측과 달리 해당 장면은 CG 없는 실제 장면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물자유연대가 공개한 촬영 현장 영상을 보면 말 발목엔 밧줄이 묶여 있다. 밧줄이 묶인 채 앞만 보며 질주하던 말은 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모든 체중이 머리에 쏠린 채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쓰러진 말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일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동물자유연대는 이런 촬영 방식은 동물 학대라고 꼬집었다. 이어 KBS 측에 말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고 촬영 일주일 뒤 사망했단 답변이 돌아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낙마 촬영 뒤 사망한 말은 경주마에서 은퇴한 '까미'다. 6살이던 까미는 약 5년간을 경주마로 활동하다 은퇴한 뒤 최근 대여업체에 팔려 왔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출연도 대여업체를 통해 이뤄졌다. 까미는 이날 주인공 말 대역으로 투입됐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은퇴 경주마의 비극적 결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9년엔 경쟁력을 잃은 경주마들이 제주의 한 도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실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미국의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유튜브를 통해 국내에서 은퇴한 경주마의 잔혹한 도축 현실을 고발하면서다. 장장 10여개월에 걸쳐 촬영된 영상 속엔 경기용 보호장비를 벗지도 못한 채 실려 온 경주마도 있었다. 페타는 "이 말은 마지막 경주가 끝난 지 72시간도 지나지 않아 도축당했다"고 했다. 트럭에 실려 온 말은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치기도 했으나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사진=미국 동물보호단체 페타 유튜브 영상 갈무리]

해당 영상이 공개된 뒤 한국마사회는 '한국마사회 말 복지 가이드라인' 등을 개정하고 말 이력제 등을 도입했다. 하지만 동물자유연대는 "해가 거듭될수록 경주마 퇴사 시 신고 기준 정확성은 낮아지고, 용도 변경 추적 관리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퇴한 경주마를 반려동물 사료로 쓰자는 방안도 검토됐다. 제주도가 한국축산경제연구원에 의뢰한 '경주 퇴역마 펫 사료 제품 개발 연구용역'에는 국내 반려동물 사료 시장 규모가 연간 5조원 이상인 점을 들어 은퇴한 경주마를 도축해 고급 사료로 활용할 경우 경제적 타당성이 있단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동물보호단체는 모든 경주마의 생애를 관리해 보호하는 세계적 추세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동물권보호단체는 정부가 말산업 육성법을 통해 말산업 강화를 외치곤 있지만, 육성된 말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대책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말의 평균 수명은 20년 이상이지만, 경주마의 은퇴 시기는 보통 2~4살가량. 경주마가 은퇴하면 승용마나 교육용 등 다른 커리어로 제2의 마생(馬生)을 시작해야 한단 뜻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은퇴 경주마의 추적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새다.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퇴역 경주마인 더러브렛 기준 지난 2016~2020년 사이 약 1400마리가 은퇴했는데, 이 중 42%가 다른 용도(교육·번식·승용)로 재활용됐으나 48%는 질병이나 부상 등으로 도태됐다. 특히 기타 용도에 속하는 10%가량은 용도 파악조차 안 되는 상황. 이에 말산업 육성 전담기관인 한국마사회의 역할이 미흡하단 비판이 나온다.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최근 YTN과의 인터뷰에서 "미디어에서의 동물 문제 관련 가이드라인을 수립해 이를 준수하도록 해나갈 것"이라며 "정부와 한국마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동물) 복지 기준 수립에 나서도록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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