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임병식 객원 논설위원입력 : 2021-08-29 16:38
과잉 의전문화에 갇힌 우리 사회

[임병식 위원]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경향신문은 ‘의전공화국’이란 특집기사를 실었다. 여기에 소개된 과잉 의전 사례는 다양하고 기발했다. 가장 흥미를 끈 건 “호텔방에 러닝머신을 설치해 봤나요”였다. 내용은 이렇다. 대기업 부회장이 2박3일 일정으로 프랑스 파리에 갔다. 본사 비서실에서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으로 에펠탑을 가득 채운 호텔을 예약할 것, 둘째, 호텔 방 안에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현지 법인에는 비상이 걸렸다. 직원들은 며칠 동안 찾아다닌 끝에 힐튼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또 파리 북부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서 러닝머신을 분해해 호텔로 가져와 조립했다. 호텔 직원들은 한국인들에게 “너희 지금 뭐하냐”,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도 오는 거냐”며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이 모든 게 아침에 에펠탑을 보면서 1시간 동안 러닝머신 위를 달려보고 싶다는 부회장 개인의 염원을 위해 한국 직원 10명이 달라붙어 돈과 힘을 쏟은 결과”라면서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의전문화를 돌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과잉 의전 문화는 바뀌었을까.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 임기 8개월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터진 법무부 차관 과잉 의전 논란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견고한 의전문화에 갇혀 있음을 상징한다. 지난 27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와 가족은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입소했다. 법무부 강성국 차관은 정문 앞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브리핑은 10여분 동안 진행됐고 현장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문제가 된 건 한 직원이 강 차관 뒤에서 무릎을 꿇고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을 접한 국민들은 “지금이 어느 때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논란이 확산되자 강 차관은 세심하게 챙기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이날 브리핑은 애초 실내에서 하기로 돼 있었는데 취재진이 몰리는 바람에 코로나19를 우려해 실외로 바뀌었다. 강 차관은 우산을 쓴 채 자료 넘기는 게 어렵게 됐고, 직원이 우산을 씌워주다 사달이 났다. 어쨌든 이날 사진은 당분간 국민들 머릿속에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과잉 의전 이면에는 신문사와 방송사 카메라 취재 관행도 한몫했다. 현장에 가면 “다른 사람은 빠지라”고 윽박지르는 사진기자와 방송사 카메라 기자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날 과잉의전도 이 같은 상황에서 빚어진 측면이 없지 않기에 바뀌어야 한다.

사실 과잉 의전은 당사자가 원해서라기보다 주변에서 알아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계급과 권위주의 문화에 굴복한 잔재다. 행정안전부에는 국가 의전서열 편람이라는 게 있다. 1위 대통령, 2위 국회의장, 3위 대법원장, 4위 헌법재판소장, 5위 국무총리, 6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이다. 의전서열은 실질적인 권력 크기와는 관련 없다. 국무총리는 권한과 권력에서 사실상 국가 2인자이지만 의전서열은 5위인 점을 봐도 그렇다.

의전서열을 정해놓은 건 괜한 시비를 막고자 하는 행정편의 때문이다. 실무자 입장에서 행사 때마다 누구를 먼저 예우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건 골칫거리다. 그런데 의전서열대로 했다고 하면 시비할 일이 없다. 국가 의전서열 2위인 국회의장 비서실에 있을 때 과잉의전을 숱하게 목격했다. 원하지 않았고 자제를 당부했음에도 우리사회에 뿌리 박힌 과잉 의전 문화를 확인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런 면에서 과잉 의전을 멀리한 정세균 국회의장의 현장 행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위문품을 전달하고 전방부대를 시찰할 때였다. 별도 식사 장소를 마련하겠다는 제안을 뒤로한 채 정 의장은 직접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아 사병 사이에서 식사했다. 또 농촌진흥청과 광양제철 방문 때도 직원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국무총리 재임 당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회의 자료와 작은 서류 가방 정도는 직접 챙기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곧바로 다음날 국무회의 때부터 실행에 옮겼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쩌면 이런 모습은 당연하다. 그런데 과잉 의전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되레 생경하게 느껴지니 아이러니다.

2017년 1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귀국과 함께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다. 이날 언론에는 방명록 사이에 면장갑과 핫팩을 끼워 놓은 사진이 화제가 됐다. 현충원 관계자는 추운 겨울임을 감안한 조치였다고 했지만 과잉 의전 논란을 촉발했다. 또 서울역에서 열린 반기문 총장 귀국환영 행사를 앞두고 대합실에 있던 노숙인들을 영하 날씨에 밖으로 쫓아냈다는 보도도 있었다. 관료사회에 만연한 과잉 의전은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권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폐기되어야 한다.

의전이 반드시 필요한 곳도 있다. 외교에서 국격에 걸맞은 의전은 국가 품격을 높이고 협상에서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외국 정상과 회담을 앞두고 그들이 선호하는 음식과 취미, 노래, 속담, 격언을 미리 파악해 배려하고 대화 소재로 삼는 건 이 때문이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청와대 의전팀은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줬다고 한다. 훗날 클린턴은 회고록에서 “감동 받았다”며 이 장면을 소개했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화기애애했음은 물론이다.

거꾸로 주권 국가로서 의전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아베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의자 높이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게 좋은 예다. 당시 일본정부가 보내온 의전대로라면 한국 국회의장 의자 높이는 일본 총리보다 낮았다. 이 때문에 한국 국회의장은 일본 총리를 올려보면서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장실은 의자 교체를 강하게 요구했고 관철시켰다. 의자 높낮이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정상끼리의 만남이라면 다르다. 그것도 우리를 얕잡기 위한 계산된 결례라는 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법무부 차관 과잉 의전 논란을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상대를 공격하고, 흥밋거리로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내린 의전문화를 돌아보는 생산적 논의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과잉 의전 문화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갑질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의전이 발달할수록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인 위계질서만 남는다. 그래서 잘못된 의전문화를 바로잡는 건 중요하다. 과잉 의전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삼아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학교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montlim@hanmail.net
컴패션_PC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