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프리즘] 글로벌 대국을 이웃국가로 둔 걸 활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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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 경희대 교수
입력 2021-08-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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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세지감 내년 한중관계 30년

 

[주재우 경희대 교수 ]


[주재우의 프리즘] 한·중수교가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한다. 한·중 양국의 외교 당국은 이를 경축하기 위한 행사 준비를 올해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4일 한·중수교 29주년을 맞은 날, 양국의 외교 수장은 준비조직으로 한중 미래발전위원회의 출범을 알렸다. 민간 영역도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이와 유사한 수많은 자칭 ‘위원회’가 작년 말부터 창설되었다. 이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염원을 엿볼 수 있었다. 다들 내년 이맘때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어 두 나라의 수도에서 경축 행사를 갖길 희망한다. 필자 역시 이런 희망이 이뤄지길 바란다.

필자에게도 중국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중 양국의 수교가 29년 전의 일이지만 필자가 중국 땅을 밟은 지는 어언 31년이 되었다. 1990년 8월말, 북경 유학길에 올랐으니, 나에게는 작년이 중국 입성 30주년의 해였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나의 중국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30년 전 중국의 모습과 북경 유학 생활, 학창시절 동안 만났던 중국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 등등. 또한 몇 군데 못 갔지만 당시 여행하면서 방문했던 수도 베이징 이외 지역과 도시들.

이런 회상에 젖을 때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30년 전에 중국이 이렇게 빨리 변할 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 내가 갔던 중국은 개혁개방을 한 지 10여년 밖에 안 됐다. 당시 중국의 발전수준을 두고 어르신들은 우리나라의 60년대 말, 70년대 초와 비슷하다고 했다. 내가 60년대 중후반 생이라 이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울 뻔했다. 그러나 70년대 초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갔던 내게 한국은 강한 인상과 기억을 남겼다.

나는 중국도 미국에서 건너갔다. 나의 70년대 초의 한국에 대한 기억이 소환됐다. 포장도로도 적었을 뿐 아니라 자동차는 그야말로 희귀품이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버스는 두 대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 대다수였다. 북경 시내에 우마차가 다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개혁개방 덕분에 그래도 수입이 생긴 북경인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지방에만 가도 자전거 역시 드물었다. 지방에서 북경으로 유학 온 학생들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야 했다.

1990년 11월 나는 학과에서 마련한 지방 견학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여정은 열흘 동안에 중국 복건성의 경제특구도시 복건시, 하문시, 정주시, 선주시 등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복건성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1978년에 채택하면서 1980년을 전후로 제일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한 지역 중 하나였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갔는데 복건성까지 편도로만 2박 3일이 걸렸다. 72시간 동안 기차 안에서 먹고 자야만 했다. 열 끼를 기차 안에서 먹었던 것이다.

그나마 우리는 침대칸을 타고 갔으니 망정이지 일반 객실 같았으면 상상하기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 중에는 입석승객도 적지 않았다. 밤에 이들은 작은 공간만 있어도 그곳을 비집고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바닥도 마다하지 않았다. 복건성은 아니었지만 상해에서 북경까지 16시간 동안 타고 오는 기차 안에서 나의 발밑을 헤집고 들어오는 중국인 여행객에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72시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기차 밖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이미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나라였다. 그러나 들판에서 중국인들이 탈곡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내가 자라면서 사회시간에나 들어봤던 원시시대의 탈곡도구를 총동원하면서 탈곡을 하고 있었다.

요즘 중국의 젊은 세대에게 중국이 30년 전만 해도 삼태기, 도리깨(곡식의 이삭이나 껍질을 말린 후 두드려서 알곡을 떨어내는 탈곡 연장)와 나무갈퀴 등으로 탈곡했다면 믿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중국에서 밥을 먹다보면 돌을 자주 씹을 수 있었다. 치아는 많은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유학생에게 가장 큰 방학숙제는 귀국 후 치과에 우선적으로 가는 것이었다.

북경의 대학 시설은 말도 못하게 낙후했었다. 냉난방은 꿈도 꾸지 못했다. 책걸상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자형 긴 책걸상들이었다. 다른 점은 의자의 폭이 10여㎝에 불과했고 등받이도 없었다. 책상 역시 일자형이며 일반 공책을 놓고 필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학교 건물의 창문틀은 알루미늄이 아닌 나무였다. 나무 창틀에 끼울 수 있는 유리는 그야말로 아주 얇은 유리였다. 창틀이 나무였기 때문에 이빨이 맞을 리가 없었다. 나무는 기후와 계절에 따라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빨이 안 맞는 창틀을 바람이 세게 치고 가면 유리는 창틀 간의 부딪침으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물의 외풍도 심했다.

겨울 아침 수업은 곤혹스러웠다. 1교시 수업은 아침 8시에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수업은 3시간 연속 강의 또는 세미나였다. 3시간을 난방이 없고 깨진 창문 사이로는 매서운 칼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수업 내내 느껴야만 했다. 손이 시리다 못해 어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수업 시작한 지 한 30분이 지나면 곳곳에서 학생들은 손을 후후 불기 시작했다. 비록 선풍기조차도 교실에 없었지만 덥고 습했던 베이징의 여름이 수업하기에는 오히려 더 적합한 기후였다.

90년대 초 중국의 경제사정은 상당히 어려웠다. 가장 긴박한 문제는 13억의 중국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이 21세기를 향해 첫 번째 세운 국정목표도 ‘온포사회(溫飽社會,등 따시고 배부른 사회)’를 이룩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여기에서 나는 중국의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년 수확철만 되면 당시 중국 언론의 가장 큰 헤드라인으로 어느 곡물이 자급자족의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장식할 정도였다.

이랬던 중국이 불가사의와 같은 기적적인 경제성과를 일궈내며 오늘날 세계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상치 못한 결정적인 변수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터넷이었고 정보통신기술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이 소개되면서 중국은 그야말로 집약적이고 초단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90년대에 중국이 비디오와 카세트 시대를 건너뛰고 CD시대로 바로 뛰어넘어 간 것보다 더 큰 경제적 효과를 제공한 것이었다.

광활한 영토,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제조업과 무역에만 의존하는 전형적인 경제발전 모델로 두 번째 국정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하세월 같아 보였다. 90년대 말 중국이 세운 두 번째 목표는 ‘샤오캉사회(小康社會,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사회)’의 구현이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에 즈음하는 2021년에 이를 달성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불가능해만 보였던 이 국정목표는 그러나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의 출현으로 가능해졌다.

중국은 우리와 여느 개발도상국이 통관의례로 거쳐야만 했던 발전단계 몇 개를 한순간에 뛰어 넘었다. 과거의 이른바 ‘개도국’들에게 발전의 정설은 1차 산업(농수산업, 경공업), 2차 산업(중공업)과 3차 산업(서비스업)을 순차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탄탄한 경제 기반을 이룰 수 있어 사상누각을 피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강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이 중국에 유입되면서 세 개의 산업이 동시에 발전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개혁개방 30년 만인 2010년에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대 경제로 올라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올 2월에 중국은 두 번째 국정목표 달성을 선언했다. 지난 2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 탈빈곤 표창 대회에서 ‘샤오캉사회’의 기준이 알려졌다. 이는 중국사회가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맥락에서 설명됐다.

1990년에 중국의 빈곤층 수가 9억8700만명에 달했던 것이 2015년 4700만명으로 감소했고, 중국의 빈곤발생률은 2012년의 10.2%에서 2018년의 1.7%로 감소했다. 즉, 최빈곤층의 수가 5000만명 이하 수준에 이르렀고 빈곤 재발률이 1%대에 유지된다는 것이 기준인 셈이다. 이런 결과를 시진핑은 공산당의 과업으로 칭송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완전한 승리”라고 선전했다.

이제 중국은 세 번째 국정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이는 20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을 맞이해 설정된 목표는 ‘대동(大同)’사회의 구현이다. 2017년 19차 전국공산당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은 이를 ‘부강하고 민주주의적인 문명과 조화롭고 수려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富强民主文明和谐美丽的社会主义现代化强国)’의 구현으로 재포장했다. 그리고 이를 두 단계로 나눠 달성할 결의를 밝혔다. 하나는 2035년까지 ‘사회주의의 현대화’를 완성시키고, 하나는 2050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치적은 가히 찬사를 보낼 만하다. 가령 상상을 해보자. 14억의 중국인이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세상을 말이다. 14억의 빈곤 규모는 오늘날의 아프리카 이상이다. 이들이 가난과 굶주림을 피하고자 제일 인접국이자 더 여유로운 우리나라로 탈출했으면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것이 상상에 지나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이미 입증되었다. 1950년대 말 중국의 ‘대약진’시기, 1960-70년대의 문화대혁명 시기 극심한 기아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북한을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북한주민의 불법 월경(越境) 행위를 대부분은 눈감아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력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중 수교 당시만 해도 오늘날의 중국 발전상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제 중국은 조만간 미국을 추월하는 세계 최대의 경제국으로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경제대국을 이웃국가로 둔 것이 우리에게는 어쩌면 행운일 수 있다. 이런 행운을 우리는 앞으로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복을 우리 스스로가 차버리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과 공존할 수 있는 책략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둔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 운명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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