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더 이상 그 美國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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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0-11-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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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시간주 랜싱의 캐피털 공항에서 지지자들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랜싱= AP·연합뉴스]



지난 3일(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대선이 초유의 접전으로 아직 당선자를 가리지 못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선거일 밤에 개표 결과 확정이 늦어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다음날 새벽 모두 승리를 주장했다. 미 선거역사상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집계가 끝나지 않은 일부 경합주의 개표 중단 소송을 제기했다. 미 선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승리 연설보다 패자의 승복 연설이 더욱 감동적일 때가 많았다. 4년 전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트럼프보다 300만표 가까이 더 많은 표를 득표했으나 선거인단 수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미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던 클린턴은 선거 다음날 대중 앞에 섰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패배의 고통이 오래갈 것이라면서도 누군가는 빨리 '단단한 유리천장'을 깰 것을 희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번 미 대선의 피말리는 개표전쟁을 보면서 2000년 미 대선이 떠오른다.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개표 분쟁이 벌어져 한달 가까이 당선자를 확정하지 못하다가 대법원의 판결로 결정되었다. 이번에도 유사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시 플로리다에서는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앨 고어 민주당 후보에게 500여표 차로 이기는 박빙의 결과가 나왔다. 조지 부시의 동생 젭 부시가 주지사였던 플로리다주에서 고어를 찍은, 의사가 분명한 많은 표들이 무효 처리됐다. 이에 고어 쪽은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부시 쪽은 재검표 중단을 법원에 제소했다. 플로리다 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결정했고, 연방대법원도 주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여 결국 부시의 승리로 귀결됐다. 고어는 깨끗이 승복했다. 그가 승복을 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전쟁 때처럼 미국은 연방정부와 주(州) 간의 알력다툼이 지속되어 대혼란 속에 빠질 게 분명했다. 고어는 당시 "이게 미국입니다. 정치색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둡니다. 새 대통령 뒤에 저도 함께 서겠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온국민의 찬사를 받았다. 


대선불복과 미국사회의 분열

미국 대선에선 선거인단 과반인 270명을 확보한 후보가 나오면, 개표 중에라도 패자가 승복 연설을 해왔다.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미국이 자랑해온 승복의 전통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대선 불복 소송으로 이미 심각한 상태인 미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악화될 조짐이다. 자칫 지지자들끼리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질 수 있는 험악한 분위기도 연출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역대 최고 사전투표율에서도 알 수 있듯 유권자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집중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침체, 부의 양극화, 인종차별반대 시위로 인한 미국사회의 분열은 악화일로였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도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지난 4년간 '미국 우선주의'와 '신고립주의'로 국제질서가 혼란에 빠진 트럼프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선거 과정과 결과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우린 미국이라는 초강국, 그리고 미국인들의 속내와 참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초반에 리드했던 일부 경합주에서 막판 전세가 역전되면서 트럼프의 당선이 불투명해진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은 예상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거를 앞두고 서방의 대다수 주류 언론들이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의 우세를 점쳤지만 이번에도 트럼프는 4년 전처럼 타고난 승부사의 관록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에겐 '샤이 트럼프(shy Trump)'라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이번에도 트럼프는 러스트벨트(쇠락한 북부 공업지대)와 팜벨트(중서부 농업지대) 저학력 백인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이들 중에는 인종과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 등 분열적이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물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만 속으로는 트럼프의 공격적인 스타일에 끌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즉, 승부를 가르는 주요 경합지에서 여론조사에 응답하지 않은, 숨어 있던 트럼프 지지자들이 예상보다 많이 투표에 나선 것이다. 

질서 파괴자(disruptor-in-chief) vs '치유의 리더(healer-in-chief)'

 
트럼프는 지난 4년간 국제사회에서 최고의 질서 파괴자(disruptor-in-chief)로 불렸다. 2차대전 이후 군사나 경제,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던 미국은 자유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세계의 경찰'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다녔다. 트럼프는 이러한 역할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서,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국제관계에서 글로벌리즘(globalism)을 금전거래로 전락시키고 국가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우리에겐 주한미군 분담금 확대라는 불똥이 튀고,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자인 중국에는 관세폭탄을 퍼부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동맹 경시, 파리기후협약·이란 핵합의·중거리핵전력조약(INF) 탈퇴, 시리아 철군 등에서 보듯이 트럼프 시대 국제질서는 곳곳에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트럼프가 돈과 미국의 국익을 위한다며 국제사회가 받아들여온 핵심적인 규범을 마구 파괴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사회의 반감이 커지면서 미국의 리더십과 위상도 크게 훼손되었다. 그동안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전통적 동맹국까지 깔보고 얕보는 미국을 진정으로 따른 국가는 얼마나 있었을까?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미국의 일방주의와 지구촌의 탈세계화는 지속될 전망이다.

40년 동안 공직에서 일한 노련한 기성정치인으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품의 바이든 후보는 '정치적 이단아'로 불리며 기성 정치의 틀을 벗어난 트럼프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트럼프 시대를 '미국의 암흑기'로 규정하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건설하자고 미국인들의 단합을 촉구했다. 선거 과정에서 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시대를 극복하고 잃어버린 '미국적 가치'를 되찾자고 주장했다. 1972년 상원의원(델라웨어주)에 당선된 직후 교통사고로 아내와 13개월 된 막내딸을 잃는 등 아픈 가족사를 당당히 극복해낸 그의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공감과 '치유의 리더(healer-in-chief)'로 이미지 매김했다. 외교 전문가인 바이든은 트럼프가 국제사회 질서와 규범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손시켰는지 누구보다 잘 알 터이다. 바이든은 집권 시 미국을 적어도 트럼프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려고 할 것이다. 환경과 무역, 기후변화 분야에서도 세계 질서 회복과 협력이 미국 같은 슈퍼파워에게 비용보다는 편익을 주고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법하다. 트럼프 시대 국제사회가 입은 상처에 대한 치유에 바이든의 역활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많은 국가로부터 존경받는 국가도 아니고 더군다나 군사적 또는 경제적 파워가 과거와 달리 압도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는 집권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자신의 바람과 달리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중국과의 관계도 미국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힘'과 '억지' 외교로 미국만이 유일하게 국제 질서를 마음먹은 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예외론(American exceptionalism)'은 트럼프 시대가 막을 내릴 경우 자취를 감출 전망이다. 대신 협력과 소통을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건설적 리더십과 역할에 대한 비전을 다시 싹틔울 수 있는 희망도 품게 된다.

한반도 정책, 한·미 동맹은


이번 대선 결과 우리에게 최대 관심은 향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일 것이다. 바이든이 당선된다면 북핵 문제 해법과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과의 직접 만남 또는 '아름다운 편지' 교환 등 정상 간의 유대를 통한 톱다운(top-down) 방식보다는 실무자 간 협의와 성과를 우선시하는 '보텀업(bottom-up)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바이든이 평소 '독재자' 또는 '폭력배(thug)'라고 비난해온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미 관계는 트럼프 행정부 이전처럼 난항이 예상된다. 정권 교체 시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북한의 도발 움직임도 경계해야 한다. 한·미 관계도 바이든의 집권 시  큰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트럼프처럼 동맹의 가치를 돈으로 셈하거나 터무니없는 방위비 분담금 요구는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 언론에 보낸 기고문에서 바이든은 주한미군 철수 협박으로 동맹인 한국을 갈취(extort)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바이든의 시대가 우리에게 그리 장밋빛을 투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는 한·미 동맹의 재구축은 결국 미국의 패권 경쟁자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중(對中) 동맹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집단안보체제인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탈중국 공급망 구상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등에 대한 한국의 동참 요구가 구체화될 전망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바이든의 스타일상 미국이 무조건 중국 때리기에 나서지는 않을 듯하다. 한반도 문제 등 사안에 따라 중국과의 협력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 동맹 강화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되 이것이 반중전선 동참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우리 정부가 직면한 중차대한 외교·안보적 도전이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도 미국과 중국, 나아가서는 일본과 러시아의 협조를 끌어내는 전략과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미국은 향후 4년 미국을 위기의 수렁에서 꺼낼 사람으로 '착한' 대통령을 새로 선택하느냐, 아니면 허풍이 심하고 성품도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선동 정치가이지만 '힘센' 대통령을 연임시키느냐 기로에 서 있다. 선거 개표에 대한 논란이 조속히 수습되길 바란다. 미국의 혼란이 상당기간 지속된다면, 미국의 통치 기능은 마비될 뿐 아니라 세계경제가 더블딥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많은 국가들은 미국이 이전의 미국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협력과 소통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건설적 리더십과 역할에 대한 비전을 다시 싹틔울 수 있는 희망도 품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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