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범죄는 합의하면 석방??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 집행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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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원 인턴기자
입력 2020-04-2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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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조계 "'합의=집행유예' 관행이 피해자 2차 피해 낳을 수도"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하고 비서를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준기(76) 전 DB그룹 회장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풀려났다. 피해자와 합의를 했으며 처벌을 원치 않고 있다는 점이 주된 이유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6단독 이준민 판사는 피감독자간음·강제추행·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회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우리나라는 2013년 관련 법령을 개정해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조항을 없앴다. 고소를 할 수 있는 기간의 제한도 없어졌다. 하지만 일선 법정에서는 여전히 성범죄는 친고죄와 같이 다뤄진다. 합의만 하면 사실상 처벌을 면하는 셈.

◆ ‘모든 혐의 유죄로 인정’···그런데도 집행유예

김 전 회장은 2016년부터 1년 동안 자신의 별장에서 가사도우미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2017년 2월부터 7월까지 자신의 비서를 상습 추행한 혐의도 있다.

게다가 김 전 회장은 경찰 수사를 피해 미국에서의 체류 기간을 연장하는 등 사실상 수사와 소추를 피해 해외도피 행각을 벌여왔다.

김 전 회장은 경찰이 여권을 무효화하고 국제형사경찰기구(ICPO·인터폴) 적색 수배자 명단에 올리는 등 압박을 가한 뒤에야 귀국했다. 도피한 지 약 2년 2개월 만이었다.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거부하기 어려운 지위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위력을 이용해 범행했다’며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판단한다”면서도 “피고인은 수사·공판 과정에서 피해자들로부터 모두 용서를 받았고 동종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을 양형 이유로 밝혔다. “피고인의 나이가 76세로 고령의 나이라는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피해자와의 합의서 제출이 양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 피해자와 ‘합의’하면 집행유예?

이처럼 '피해자와 합의를 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감형된 성폭력 사건은 수두룩하다. 강간죄의 특별양형인자에서 감경 요소로 ‘처벌불원’ 항목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처벌불원’의 정의는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성계는 물론 법조계에서도 ‘합의’가 지나치게 기계적 감경 사유로 작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합의가 사실상 면죄부 역할을 하면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강요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외주 스태프 여성 2명을 성폭행·추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탤런트 강지환씨는 피해 여성들 2명과의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점이 감경 요소로 작용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피해 여성측은 자신의 소속업체로부터 강씨와의 합의를 종용받았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업체 관계자는 “강지환은 이미 잃을 것 다 잃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냐”, “오히려 너희가 앞으로 닥칠 일을 무서워 해야 한다” 등의 말로 합의를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신입사원 여직원을 성폭행한 가구업체 한샘의 전 직원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피해자와 합의해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 점을 고려했다”며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때도 한샘의 전 인사팀장이 피해자를 회유해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정황이 밝혀지며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사건이 은폐될 뻔 했는데도 합의의 존재가 석방의 이유가 됐다. 

합의를 한 뒤 태도가 돌변하는 가해자들의 태도도 문제다.

김 전 회장의 피해자도 피고인이 진심으로 반성하는지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합의가 ‘금전’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합의 감경 제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풍조를 양산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재벌 총수 등 부유층에게는 합의 감경 제도가 결국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사고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재벌 판결에서도 성인지 감수성 절대로 잊지 말아야...”

법조계는 '피해자가 이후에 별개의 민사소송을 취하지 않아도 빠르게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합의 제도에 긍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 보호에 유용한 제도인지, 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인지 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한다. 

한편 김 전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더불어민주당 이경 부대변인은 지난 19일 논평에서 “납득할 수 없다”며 “재판부가 시대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뒤처져 있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재판부는 재벌 판결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이 바라는 나라이다”라고 덧붙이며 재판부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과 함께 재판부가 재벌 판결에 너그럽다는 점도 꼬집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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