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중국 리펑 전 총리 별세..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vs 톈안먼 학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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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선 기자
입력 2019-07-24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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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관영언론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걸출한 혁명가" 칭찬일색

  • 톈안먼 사태 강경진압 주도에···'학살자' 꼬리표

  • 혁명원로 자제···우리나라와 인연도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강경 진압을 지휘한 리펑(李鵬) 전 중국 총리가 22일 밤 별세했다. 향년 91세. 그를 두고 중국 국내외 평가는 엇갈린다. 중국 관영 언론이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라 표현한 것과 달리, 인권단체들은 그에게 ‘톈안먼 학살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줬다. 

◆ 中 관영언론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걸출한 혁명가" 칭찬일색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명의로 리펑 전 총리 부고를 발표했다.

부고는 리 전 총리를 "중국 공산당의 우수당원으로, 오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은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묘사했다.

이어 부고는 “1989년 봄·여름 환절기 발생한 정치적 풍파 속 덩샤오핑(鄧小平) 동지를 대표로 하는 선대 무산계급 혁명가의 단호한 지지 아래 리펑 동지는 분명한 정치적 태도로 당중앙정치국 대다수 동지들과 함께 과감한 조치를 취해 반혁명 폭동을 진압하고 국내 정세를 안정시켰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가 당과 국가의 미래 운명과 관계되는 중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가 은퇴 후에도 후진타오(胡錦濤)와 시진핑(習近平)의 당중앙 지도부를 결연히 옹호하고 지지했으며, 반(反)부패와의 전쟁도 지지했다고 전했다. 

이어 부고는 리 전 총리를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중요한 개창자이자, 충실한 실천가, 적극적인 추진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은 당과 국가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전했다.

24일 인민일보 1면에 게재된 리펑 전 총리 부고기사. [인민일보 ]


◆ 톈안먼 사태 강경진압 주도에···'학살자' 꼬리표

중국 관영언론의 칭찬일색 평가와 달리 해외 인권단체들은 그에게 ‘톈안먼 학살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왔다. 그가 과거 1989년 6월 톈안먼 시위대 강경진압을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톈안먼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리펑이 사망했다(블룸버그 통신)", "톈안먼 광장 시위 진압을 위해 정예부대를 투입한 강경총리(가디언)"라고 표현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사망을 계기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리 전 총리는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 등과 함께 시위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趙紫陽)과 맞섰다. 결국,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무력진압을 결정, 인민해방군과 탱크를 동원해 톈안먼 시위대를 강경진압했다. 이는 수 많은 인명피해를 낳으며 전 세계 지탄을 받았다. 중국 정부는 당시 공식적으로 약 2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미국 등 서방국에서는 사망자가 사실상 수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톈안먼 시위 당시 학생지도자였던 왕단(王丹)은 앞서 리펑 전 총리가 톈안문 진압에서 한 역할은 세계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여전히 톈안먼 사태와 관련한 언급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톈안먼 강경 진압을 계기로 한때 덩샤오핑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됐던 자오쯔양은 실각하고, 리 전 총리가 사실상 공산당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결국 장쩌민(江澤民) 전 지도부 체제 아래에서 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라는 '2인자' 자리에 만족해야만 했다. 일각에선 이는 톈안먼 사태 진압을 지휘했다는 한계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리 전 총리 역시 생전에 톈안먼 사태 강경 진압에 대한 부담을 느꼈던 듯 하다. 그는 과거 2004년 8월 당기관지 ‘구시’ 기고문에서 과거 텐안먼 사태를 덩샤오핑 동지를 비롯한 오랜 동지들이 확고히 결정해 지지한 조치였음을 밝히기도 했다. 2010년엔 톈안먼 사태와 관련한 회고록인  '6·4일기' 출간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되기도 했다.

◆ 혁명원로 자제···우리나라와 인연도

1928년 10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출신인 리 전 총리는 혁명원로 자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리숴신(李碩勳)은 저우언라이(周恩來) 등과 함께 난창(南昌) 봉기를 주도한 혁명원로다.  혁명 중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를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보살펴줬다. 17세에 공산당에 가입해 러시아에서 유학한 그는 귀국 후 전형적인 엘리트 기술 관료 코스를 밟았다.

특히 그는 전력 계통에서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다만 그가 과거 대대적으로 밀어붙였던 싼샤댐 공정은 수백만명 주민 강제이주, 고대문물 수몰, 환경 파괴 등으로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다. 

1988년부터 10년 간 중국 총리를 지내며 1992년 한·중 수교의 결실을 맺었다. 1994년 10월 중국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김영삼 대통령과 회동도 했다. 1998년 총리에서 물러난 후 2003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우리의 국회의장)으로도 재임했다.
 

리샤오펑(왼쪽) 중국 교통운수부 부장과 리샤오린 전 중국전력국제유한공사 회장. [사진=홍콩명보]


리 전 총리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이어 전력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딸 리샤오린(李小琳)은 중국의 '전력여왕'으로 불리며, 중국전력국제유한공사 회장을 역임했다. 아들 리샤오펑(李小鵬)도 중국 5대 전력회사인 화넝그룹 이사장, 산시성 성장을 거쳐 현재 교통운수부 부장으로 재임 중이다. 

다만 리 전 총리가 과거 전력 계통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액을 부정 축재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며, 자녀들 역시 조세 회피와 비리 의혹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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