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김원봉 신드롬과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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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19-04-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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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약산 김원봉(1898∽1958년?)이 단재 신채호에게 집필을 의뢰했다. 191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결성해 무장 항일투쟁에 나섰지만 너무 과격하다고들 했다. 의열단의 대의(大義)를 재천명할 필요가 있었다. 저 유명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1923년 1월이었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폭력, 즉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젊은 약산은 폭력혁명의 가능성을 믿었다. 오직 민중의 폭력에 의해서만이 일본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日警) 수명을 사살한 후 권총으로 자결한 김상옥, 1926년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투탄(投彈)하고 일경에 쫓기자 자결한 나석주 등이 모두 의열단원이었다. 신용하 교수는 의열단선언으로 일제와의 타협주의가 분쇄되고, 독립운동과 민중혁명 의식이 고취됐으며, 김구의 상해임시정부도 폭력수단을 채용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2008년)

경남 밀양 출신으로 9남2녀의 장남인 약산은 서울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1925년엔 광저우(廣州)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쑨원(孫文), 교장은 장제스(蔣介石). 졸업 후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한다. 1927년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난창(南昌)봉기에 참여하고, 1929년 베이징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다. 1932년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고 청년간부를 양성한다.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건해 총대장이 되고, 1941년 김구의 임시정부에 참여해 광복군 부사령이 된다. (김상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약산은 1945년 12월 광복군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해 1946년 여운형과 함께 김규식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미 분단으로 치닫던 남쪽에선 자신과 같은 통합적 좌파조차도 설 자리가 없었다. 약산은 1948년 4월 월북해 전 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4월 19일 평양)에서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과 함께 28인의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국가검열상(1949.9∽1952.5)과 노동상(1952.5∽1957.9)을 지낸다. 검열상은 당원과 기관의 당 노선 준수 여부를 감시하고, 노동상은 근로인력 동원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약산은 독립운동의 정의(定義)와 성격을 바꾼 사람이다. 누구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좌파계열의 항일투사였다. 결정적인 건 김일성 전시내각과 전후 복구시기에 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냈다는 점이다. 약산이 6·25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한 예를 들면 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국군포로를 남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이 추산한 유엔군 및 국군 포로는 13만2474명이었으나, 북은 1만1559명의 명단만 내놓았다. 이 숫자조차도 앞서 북한군 총사령부가 발표한 ‘10만명 이상’과는 큰 차이가 났다.(한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자유아시아방송(RFA)은 1만3000명의 미송환 국군포로들이 북의 군부대와 탄광 철도 등 각종 공사에 동원됐다고 2005년 보도한 바 있다. 약산은 근로인력의 수급과 동원을 책임지는 노동상이었기에 여기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약산은 1958년 3월 조국해방전쟁에 기여한 공로로 노동훈장을 받는다. 그해 말 약산은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된다.

약산의 생애를 이렇게나마 압축해놓고보면 그에 대한 서훈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 같다. 훈장을 준다고 그가 고마워할까? 누구를 위한 신원(伸冤)일까, 죽은 자, 아니면 산자? 그럼에도 서훈을 해야 한다면 일단 실정법 차원에서 다루는 게 순리다. 법률에 따른 자격심사와 절차를 통해서 결정하라는 얘기다. ‘역사적 평가가 곧 훈장’이라는 등식을 버려야 한다. 법이 잘못됐다면 바꾸면 된다. 서훈보다 중요한 건 사실규명이다. 그동안 일단의 연구자들이 외롭고 힘들게 약산이 잊혀진 존재가 되는 걸 막아냈다. 1993년 『김원봉연구』를 쓴 염인호 교수(서울시립대),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등의 공이 크다.

그럼에도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칸들이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약산을 공부했거나 아는 쪽은 서훈에 대해 관용적이고, 그렇지 않은 쪽은 인색하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김일성에게도 훈장을 주라는 말이냐?”고 한 건 후자에 속한다고 본다. 첨단 지식정보화시대에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에 대한 ‘앎’과 ‘모름’ 때문에 달라진다면 우스운 일이다. 최소한의 지식과 이해를 공유한 기반 위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공정하다.

그런 점에서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최근 발굴해 공개한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였던 알렉산드로 푸자노프의 일지(1958년 10월 24일자)는 의미가 크다. 이에 따르면 “약산은 연안파숙청이 아닌 청우당 당수 김달현 미제간첩 사건과 관련해 실각했고, 체포되기 전 남쪽으로 도주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고 한다.(오마이뉴스 2019년 4월 12일) 이런 자료와 연구결과들이 앞으로 더 나와야 한다.

MBC가 다음달 4일부터 약산을 다룬 드라마를 내보낸다고 한다. 약산만큼 극적 요소를 갖춘 인물은 없다. 준수한 외모에 행동하는 지성인 이미지까지. 여기에 오늘의 한국사회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오버랩 되면 더 근사할 것이다. 필자는 ‘약산 열풍’을 ‘행동’에 대한 갈망 탓으로 본다. 속되게 말하면 ‘주둥아리’에 신물이 난 젊은이들의 반란이다. 제발 ‘닥치고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거다. 상소문 쓰다가 망한 500년 조선왕조도 지겨운데 또 상소문인가? 반칙과 비효율이 난무하는데 구호만 있지 제대로 된 게 뭐가 있나? 그 분노와 절망감이 약산을 ‘사이다’처럼 불러낸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이미 영화 ‘암살’이 그랬던 것처럼 한편의 드라마가 역사의 균형추를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게 할 수도 있어서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한다고, 시청률이 높다고 약산이 턱없이 미화되기야 하겠는가마는 내심 불안하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약산은 약산이다. 시청자들이 부디 이 ‘역사전쟁’의 관객이 아닌 준엄한 판관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중국서 독립투쟁 활약 당시의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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