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차등(差等)을 부르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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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입력 2018-0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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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몽테뉴는 <에세>에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짐승 사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만큼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플루타르크의 말을 인용함과 동시에 ‘마음의 능력’과 ‘내적 소질’을 외면한 사람 사이의 차등을 지적했다.

흔히 준마(駿馬) 여부를 판가름하는 요인은 그 힘과 숙련됨에 있지, 멋진 안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동물을 관찰할 때는 오감을 열어 본질을 예의주시하려 애쓰지만 왜 유독 사람에겐 인색하고 거칠까?

18세기 조선의 학자 권상신(權常愼)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그는 <나귀와 소(驪牛說)>라는 작품에서 “사람들이 소를 천시하고 나귀를 중시하는 것은 그 외모 탓일까?”라고 묻는다. 즉, 의관을 갖춰 입은 이가 잘 꾸민 나귀를 타면 모두들 ‘나귀가 참 아름답다’라고 말하지만 쟁기를 멘 소를 웃통 벗은 이가 끌고 가면 모두들 ‘소가 참 바보 같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만들어낸 차등에 결국 제 스스로 속는 역설을 탄식한다.

시공을 달리함에도 몽테뉴와 권상신은 모두 외피와 본질에 대해 고민한 셈이다. 처음엔 동물 이야기로 시작해 사람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그 기준의 문제로 접근했다. 부와 권력으로 표면화된 서열, 이는 종종 사람 본연의 내재적 가치를 가려버린다. 섣부른 평가는 관계의 차등과 단절, 박탈감을 빚어내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고민이기도 하다.

껍질을 들추면 비로소 보이는 본질적 차이와 그 ‘반전’의 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눈을 신중히 경계하는 데서 출발해야 옳다. 어느 하나 녹록한 것 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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