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응답하라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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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북칼럼니스트·작가
입력 2017-09-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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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사진=최보기 북칼럼니스트·작가]


응답하라 1973

왜 하필이면 ‘1973’인가에 대해선 큰 의미가 없다. 그냥 내가 어렸던 1970년대 섬나라의 추억을 반추하려니 초등학교 중간급인 그해가 적당할 것 같았을 뿐이다. 팍팍하고 건조하고 때론 비정하기까지 한 현대 도시 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40년 너머 그 시절의 추억은 비록 모두가 가난했지만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꼭 그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는 성찰을 내포한다.

기억력 감퇴가 뚜렷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노래가 있다. ‘일하시는 대통령, 이 나라의 지도자, 삼일정신 받들어, 사랑하는 겨레 위해, 오일륙 이룩하니, 육대주에 빛나고, 칠십년대 번영은, 팔도강산 비추네, 구국의 새 역사는, 시월유신 정신으로’라는 노래다. 초등학교에서 반별 경연대회를 했을 정도로 불렀기에 아직도 음률과 박자를 정확히 기억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불렸던 것이 아니라 내가 살던 남해안 일대에서만 유통됐었다. 다분히 정략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 만도 하다.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당시 뜨르르한 국회의원이 둘이었는데, 한 사람은 저 ‘일하시는 대통령’을 따르라는 공화당 소속이었고, 한 사람은 ‘따르지 말자’는 신민당 소속이었다. 두 분 다 이미 고인이 됐기에 특히 후자의 이후 정치적 변절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그냥 접겠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저 두 사람의 한 장짜리 벽보식 달력이 집으로 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공화파였던 아버지는 전자의 달력은 안방 벽에다 붙이고, 후자의 달력은 나를 줬다. 그 달력은 설을 앞두고 가오리연을 만들거나 새 학년이 돼 받는 교과서의 표지를 싸는 데 적격이었다.

그때쯤 겨울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용의검사가 시행됐다. 사전예고제였으므로 용의검사 전날 우리는 봉두난발 머리를 자르고, 시커멓게 때가 낀 손발톱과 손등, 발등을 더운 물에 담근 후 껍질이 벗겨져라 돌로 문질러야 했다. 그러지 않고 갔다가는 여러 학생들 앞에 불려나와 공개 창피는 물론 선생님의 몽둥이 회초리가 손등과 발등에 아프게 꽂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용의가 단정치 못해 매를 맞으며 우는 학생들은 꼭 있었다. 그때 맞는 매는 학교에 내야 할 돈 안 냈다며 교실에 이름 적혀 내걸린 빨간 종이딱지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손등, 발등에 때가 덕지덕지 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들의 놀이 때문이었다. 별다른 장난감이 없었던 우리는 구슬이나 딱지처럼 공산품도 있었지만 그건 현금이 필요했고 대부분은 흔한 자연의 소재를 이용했다. 마당이든 골목이든 아이들의 놀이는 끝이 없었다. 소 먹이러 간 아이들은 양질의 풀밭을 걸고 옆 동네 아이들과 단체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고누, 윷놀이, 공기(拱碁), 비석치기, 자치기, 씨름이 대표적이었다.

깨진 기왓장 조각을 돌에다 갈아 매끈하게 만든 개인 공기는 선수의 기본이었고 그들의 손놀림은 현란했다. 시골이라 들판이 많아 자치기의 작은 자 크기가 도시보다 스무 배는 컸는데, 주로 단단한 팽나무 가지를 잘라 만들었다. 수비 팀 아이가 씽씽 날아드는 작은 자를 받으려다 얼굴에 맞아 앞니가 깨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아랫마을 삼식이는 어디선가 첨단의 대리석 조각을 구해 비석으로 삼았는데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거기에 맞서려 앞산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서 찾아냈던 나의 오각형 화강암 비석마저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해거름녘이면 우리들의 놀이는 급하게 끝났다. 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일 때 ‘우랑바리나바라 무따라까뿌라야 커져라 세져라 여의봉’의 손오공이 빌보드차트 1위였고, 2위는 파란해골13호를 납작코로 만들어버리는 마루치 아라치였다. 나는 집에 라디오가 없어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던 삼식이네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어느 날 비석치기로 삼식이와 다툰 후 라디오를 들을 수 없어 실의에 빠진 나를 본 아버지께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성라디오를 들고 보무 당당하게 집으로 오셨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광고는 부채표 까스 활명수, 이 소리도 저 소리도 나지 않는 용각산이었다. 이장 댁에 텔레비전 안테나가 서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 마당에서 김일 레슬링이나 아시안컵 축구 중계에 환호했던 것은 그 몇 년 후였다.

이것도 저것도 없는 방학 때의 밤에는 가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나와 마을회관 앞마당에 하얀 천막을 세워 영화를 틀어줬다. 지금이야 빔 프로젝트가 발에 차이지만 당시에 영사기는 면사무소에 딸랑 한 대 있을까 말까였다. 주로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성웅 이순신 장군이나 위화도에서 말과 함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성계 장군의 영화를 틀어줬는데, 그 또한 지금 보면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영화, 이원세 메가포온,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오늘 밤 녹동극장’에서 펑펑 울었던 것도 그 몇 년 후였다.

그러나 저러나 이러나 그 모든 추억을 제압했던 것은 아버지께서 모처럼 큰돈이라도 만지시면 사오셨던 별사탕 뽀빠이와 건빵 그리고 어머니께서 민족상잔의 6·25 동란에 출정하는 아들을 대하는 마음으로 어쩌다 끓여주셨던 빨간 봉지의 라면이었다. 사카린 팍팍 넣은 동짓날 팥죽도, 설날에나 한 번 얻어먹던 떡국도 라면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였다. 물론, 라면 이상으로 2차 성징 이후 남자 어린이들의 유쾌한 자위를 지원했던 명품도 있긴 했었다. ‘선데이 서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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