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1]“새 시대에 맞는 공부를 해라” 부친의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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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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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1)

  • 제1장 성장과정 - (6) 늦게 들어선 신학문의 길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송호(松湖) 이기모(李基模)는 1919년 향년 82세라는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아들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송호정(松湖亭) 뒷산의 명당에 묘자리를 잡고 성대한 장래를 치뤘다.

1919년은 저 유명한 3·1 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났던 해로서, 우리 근대사의 한 시기를 긋는 해이기도 하지만 송호가(松湖家)에 있어서도 변화를 겪는 뜻 깊은 해이기도 했다. 석와가 송호를 이어 처음으로 만석꾼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석와가 부지런히 재산의 증식에 힘쓴 결과로, 또한 세계 제1차 대전기간인 1914년에서 1918년에 이르는 4년 동안 전쟁경기도 타게 되어 재산은 몇 배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재력을 가지고 석와는 송호정을 짓는 등 가문의 발전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발전보다도 더 큰 진전은 석와가 일대 심경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점이라 하겠다.

그것은 신학문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변화하는 새 시대에 발맞추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한학(漢學)만으로는 대처해 나아갈 수 없고, 신학문(新學問)을 익히는 것이 절실히 요구됨을 그는 시대의 변천을 겪으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석와는 마침내 1920년, 아들 목당(牧堂) 이활(李活)에게 신학문을 받도록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권유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명령이었다. 물론 당시의 사정은 한학을 하다가 늦게 신학문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목당의 나이 벌써 스물 두 살에 이르고 있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는 부친의 명령에 따르기로 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 또한 그가 바라기도 했다. 신학문의 길로 나서는 이상 남보다 앞서야 된다는 것이 석와의 간절한 당부였고 목당 또한 그럴 결심이었다.

목당의 신학문 입문은 이토록 뒤늦은 출발이었으므로 좀 더 빨리 익히기 위하여 속성 중학과정을 택해 그는 우선 대구에 있는 교남학교(矯南學校, 현 대륜 중·고등학교. 1921년 9월 애국지사 홍주일·김영서·정운기 등 3명이 인재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설학원. 당시 교사로 근무했던 시인 ‘이상화’와, 당시 학생이었으며 시인·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를 배출했다)에 입학하기로 하고 집을 떠났다. 교남학교는 대구 부가(富家) 이일우(李一雨)가 경영하던 우현서루(友弦書樓, 항일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의 백부인 소남 이일우 선생이 1904년 인재양성을 위해 건립한 학숙. 강의원, 교남학교의 모태) 자리에 세워진 중학과정 속성과 학교로서 이런 계통의 학교로서는 이름있는 학원이었다. 한편 석와는 목당이 불편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가까운 수동골에 집 한 칸을 마련해주는 등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목당은 조급했다. 그만큼 그의 뜻은 컸던 것이다. 그는 목표를 일본 와세다 대학에 두고 있었다. 그는 낮에 중학과정 학교에 나가는 한편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와세다 대학 강의록을 받아 통신교육 과정도 공부했다. 공부에 쫓겨 잠시도 시간 여유가 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잠시 쉴 틈도 전혀 없이 그는 공부에만 열중했다.

교남학교에서 2년여의 모든 중학과정을 이수하자마자 청년 목당은 곧 일본으로 건너가 마침내 꿈을 키워온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유학기간도 늦게 신학문에 뛰어든 그에게는 여전히 공부에만 여념이 없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특히 목당이 대구에 머무는 2년 동안에 그가 받았던 여러 가지 자극이 그에게 박차를 가해 온 것도 사실이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책(文化政策) 시정(施政)의 일환으로 일제히 발간되기 시작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등은 대구의 지방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한성은행(漢城銀行) 대구지점이 설립되고 장길상(張吉相, 1874~1936년. 조선의 문신이자 일제 강점기 사업가)의 경일은행(慶一銀行, 1920년 장길상이 대구에 설립한 민족계 은행. 1933년 12월 일본인 소유의 선남은행과 강제로 합병, 일본인이 소유한 대구상공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인의 경상공립은행(慶尙公立銀行), 조선은행(朝鮮銀行, 한국은행의 전신),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KDB산업은행의 전신) 지점도 설치되어 7개의 은행이 난립되는 등 활발한 금융활동이 전개되어 새 경제체제로의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목당을 크게 자극한 것은 그동안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젊은 엘리트들의 사상활동(思想活動)이어서, 그는 세상이 바야흐로 변모하고 변혁되어 가고 있음을 피부로 직감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목당에게 있어 이러한 충격은 이미 두 번째로 겪는 것이었다. 그가 매호동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일어난 3·1 운동의 소식이 그에게는 첫 번째 충격이었는데, 영천 장에서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는 만세운동이 터졌다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더니 벌써 이웃 양평동의 서생(書生)들까지 만세운동에 나섰다는 것이 아닌가. 청년 목당은 무엇엔가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편안하게 상식을 주장하는 한서(漢書)들을 읽고 있는 동안 바깥의 또래 젊은이들은 사상적으로 그보다 훨씬 앞서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때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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