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증조부부터 부 쌓아···목당 대에 명성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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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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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

  • 제1장 성장과정 (3) 영천이씨 가문의 뿌리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이부자(李富者, 이활 회장 집안을 칭함)는 낙운(洛運)-기모(基模)-인석(璘錫)-활(活)-병인(秉麟)으로 이어지는데 29대의 낙운은 6형제 가운데 다섯째 아들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맨주먹으로 출발하여 오로지 성실과 근면만으로 생전에 오백석꾼이 됨으로써 이 씨 가문의 부의 기초를 닦아 놓은 인물이다. 심지어는 그의 부인까지도 항상 베틀에 앉아 밤낮없이 삼베를 짜 장날에 맞춰 내다 팔곤 했으며, 베를 짜다가 허기가 지면 냉수에다 간장을 타서 마시면서까지 억척스럽게 집안을 일으키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렇게 하여 외아들 송호(松湖) 이기모(基模)에게는 오백석지기 땅을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이며, 목당가(牧堂家)의 부의 기초가 된 이 오백석 땅이란 바로 낙운 내외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한편 다음 대인 송호 이기모 역시 물려받은 재산을 축내는 일이 없이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과거에 응시, 초시에 등과하는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으며, 감역(監役),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등을 지내는 한편으로 부모의 큰 뜻을 이어받아 영농에도 힘을 기울였다.

송호는 1837년생으로 1918년 82세로 타계하는데, 그가 생존한 시기는 헌종·철종·고종·순종에 이어 일제 침략기에 걸치는, 실로 9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또한 동학(東學)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즉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崔水雲, 1824~1864년)은 송호의 이웃 고을인 경주 가정리 사람이었으며, 그가 동학을 창도하고 나선 1860년은 송호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였다. 따라서 영천 고을은 자연 동학의 영향 밖에 있을 수는 없었다.

최수운이 동학을 일으킨 지 17년 되던 해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요로 개항을 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은 국내 봉건세력의 착취와 외래 산업자본주의의 침략에 의하여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정치는 극도로 부패, 매관·매직은 방방곡곡에서 성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가 1894년(고종 31년)에 농민군 대책 연구의 중신회의 석상에서 “4칸 집 한 호에 대해 한 해에 쌀 4섬 이상의 조세를 부과하고 있어서 농민들의 참상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들의 참상과 고통은 비단 식생활에만 그치지 않았다. 국내 봉건세력의 압력 외에 또 하나의 뼈를 깎는 고통이 겹쳐서, 의류생활에 굶주리고 있는 당시 국내 실정을 틈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마(魔)의 상품(商品)’이라 할 양목(洋木)·당목(唐木)이 밀려 들어오자 순진한 백성들이 너도 나도 광목옷을 걸치기 위해 쌀뒤주를 털고 소를 파는 풍조가 전국을 휩쓸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광목망국(廣木亡國)을 깨닫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서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릴 정도로, 갑작스러운 외세의 물결에 온 국민은 가치관을 잃고 방황하였던 것이다. 나라 사정이 이렇게 되자, 조선 500년 사직은 망하고 계룡산을 도읍으로 하는 새 왕국이 생길 것이라는 정감록(鄭鑑錄)의 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와 같이 혼돈된 사회를 배경으로 동학은 광범하게 백성들을 하나로 집결시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경상도 일대를 풍미하였고 차츰 삼남(三南,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세 지방의 총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겁이 난 조정은 그의 제자 20여 명과 함께 최수운을 체포하여 1864년 3월 2일, 대구감영(大邱監營)에서 효수형에 처하기에 이르나 이미 불붙기 시작한 동학운동은 그의 제자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더욱 그 세력이 널리 번져 1894년에는 마침내 저 유명한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고 말았다.

송호는 동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착실히 재산을 늘렸다. 그는 선친 낙운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석의 기반으로 개항 경기(開港 景氣)에 들떠 대구나 부산 등지로 떠나는 이농가(離農家)들이 땅문서를 들고 찾아오면 시세껏 값을 쳐서 사들여 인심을 얻어가며 대지주로 커갔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와중에 영천 일대에도 화적떼가 들끓기 시작했는데, 화적떼란 관군과 일본군에 쫓겨 산 속으로 숨어든 동학군(東學軍)이 굶주린 끝에 마을로 내려와 잘 사는 집을 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송호의 집도 부자로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이들의 표적이 안 될 리 없었다.

화적떼가 침입하면 마을의 개들이 짓게 되고, 그러면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이웃에 알려 남자들은 피신하고 집에는 그들이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쌀자루를 대청에 매달아 놓고는 했는데 하도 자주 화적떼의 습격을 받자 송호는 이런 와중이지만 항상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집안일에만 충실한데다 성격도 꾸밈새없이 소탈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때로는 가까운 벗들을 끌고 경주로 주연(酒宴)을 베풀러 가기도 했는데, 옆에 앉은 기생이, “영감님 손은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크세요?”하고 물으면 “이게 농사꾼의 손인기라”하고 호쾌하게 웃고는 했다. 큰 부자면서도 그는 농사일에 열심인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부지런하면서도 풍류를 아는 그런 활달한 사나이였다.

그는 1882년 46세 때 그렇게도 바라던 아들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을 보았고 82세까지 수를 누리면서 아들한테 3000석의 큰 재산을 물려주고 눈을 감았다. 그가 묻힌 심곡제(心谷齊) 뒤편의 묘터는 금계(金鷄, 꿩과의 새. 꿩과 비슷한데 수컷은 광택 있는 황금색 우관과 뒤 목에는 누런 갈색, 어두운 녹색의 장식깃이 있어 매우 아름답다)가 알을 품고 앉은 형세의 명당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석와 인석이 태어난 해는 1882년이며, 그는 개항의 소용돌이 시점을 배경으로 자라 한일합방(韓日合邦)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20대 초기에 초시에 등과하여 첫 관직으로 부임한 자리가 경상관찰부 주사(慶尙觀察府 主事)였다.

대구 관찰부에는 주사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총무직(總務職)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법관(司法官)이었는데 석와는 바로 사법관의 주사였다.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임고의 자기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고는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언제나 역마를 몰고 대구에서 영천읍을 거쳐 집으로 와서, 거리의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문밖으로 쫓아나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석와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며 주위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월성손(月城孫)씨 집안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마침내 자손이 귀했던 집안에서 활(活)과 홍(泓), 담(潭), 호(澔)의 네 형제를 얻었다. 그런데 석와는 부인이 해산을 할 때가 되면 그때마다 친정에 보내어 해산을 하게 하면서 순산 소식이 오면 많은 선물을 보내어 새로운 자식의 태어남을 축복하고 부인에게는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때까지 이부자의 부는 29대 낙운으로부터 31대인 석와까지 3대를 내려오는 동안에 쌓은 것인데, 이제 자식 귀한 집안에서 네 아들까지 얻으니 그것이 벌써 이씨 가문에 전성기가 찾아온 징조가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3대의 풍채들이 벌써 모두 남보다 뛰어났으니 말이다.

외모로 보아도 모두가 훤칠한 키에 당당한 몸짓을 자랑하는 거구요 성격들도 한결같이 활달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탐욕하지 않으며 근엄하면서도 풍류를 아끼는 그런 남아들이었다. 목당의 대에 와서 네 형제 모두가 출중했던 것도 이런 집안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씨 가문은 고려 초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을 그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문은 영천이씨(永川李氏) 가운데서도 상장군파(上將軍派)에 속하는데 고려 중엽에 상장군 평장사를 지낸 수춘(守椿)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14대조 문한당(文閒堂) 이감(李敢)은 전라감찰사를 지냈고 20대조는 훈련부장으로 통정부대에까지 올랐다.

문한당이 설립한 임강서원(臨崗書院)과 심곡제(心谷齊)가 목골에 있고 제실(祭室) 또한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목당가(牧堂家)는 이곳에서 적어도 18대 이상을 살아온 것이며, 그 후 오랫동안 벼슬길이 끊겨 빛을 못 보다가 30대인 목당의 조부 송호 이기모 때에 와서야 다시 벼슬길이 열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목당에 와서는 형제들이 모두 사회에 진출하여 뛰어난 업적들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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