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당초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누가 승자인지 패자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도 이런저런 명분과 목표를 내세웠지만 현재까지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채 국력을 소모하고 있다. 특히 노동력과 자원의 상당한 손실은 중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의 저해 요인이 될 것이다. 유럽과의 단절은 전쟁이 끝나더라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고, 국가 이미지의 훼손은 특히 주변 구소련 공화국들과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방은 어떤가? 독일 Kiel 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지원 규모는 올해 10월 현재 미국이 1150억 유로, 유럽 전체가 2370억 유로이다. 유엔난민기구 통계에 따르면, 2026년 4월 말 기준 우크라이나 난민의 대부분인 약 520만명이 유럽 내 수용되어 있는데 난민들에 대한 지출로 유럽 각국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그간 의존하였던 저렴한 러시아산 에너지를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생산비용이 증가하여 심각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고 기업들은 대외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등 경제 사정이 매우 좋지 않다. 유럽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한 결과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어떤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주로 갖고 있는 무기를 보내준 것이긴 하나 그만큼 무기고를 채우기 위해 방산 부문 지출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는 결국 미국 납세자들의 부담이다. 미국 등 서방은 이번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약화라는 전략적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였겠으나 동시에 자신들도 약화되었다. 특히 유럽의 경우 최근 프랑스의 혼란이 이웃 나라로 번지고 있는데 프랑스 시위 사태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에 따른 재정 악화가 요인의 하나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 경제적 측면만 보면 그간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는 ‘자기 발등을 찍는’ 행동으로 귀결되었다. 유럽연합은 최근 미국의 노골적인 외면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부담이 가중되자 캐나다와 영국에 손을 벌리는 실정이다. 반면에 중국은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으며 종전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중국은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전혀 없으면서 러시아에 대해 ‘갑’의 위치에서 러시아산 에너지를 저렴한 가격으로 사들이고 있고, 한국 및 서방 기업들이 철수한 러시아 시장은 사실상 중국 기업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특히 러시아가 무기 제조에 필요한 주요 부품을 거의 중국에 의존하면서 양국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러시아의 대중국 의존 심화는 특히 극동 러시아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의 종전 구상과 대러 접근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자신이 취임하면 24시간 이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간 트럼프는 푸틴을 회유하고 젤렌스키를 압박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상당한 맷집을 보이는 러시아보다는 서방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크라이나를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 젤렌스키가 자신의 압박에 순순히 호응하지 않자,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교체까지 거론하였다. 그런데 나토의 한 축인 미국이 종전을 서두르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더 이상 얻을 것은 없는 반면에 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란 전쟁이 진행 중이고 미국의 대외정책상 제1 목표인 중국 견제에 집중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미국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무엇이든 이쯤 해서 전쟁을 끝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국 우크라이나는 미국 안보에 있어 ‘사활적’ 또는 ‘핵심’ 지역이 아님을 보여 준다.
러시아를 중국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는가
지난해 8월 알래스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단순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데 머물지 않고 북극 및 알래스카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대러 제재 해제 가능성과 대중 견제를 위한 전략으로써 러시아를 포용할 생각이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한쪽을 이용하여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전략적 사고를 70년대 초 대중공 화해에서 이미 보여 주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소련과 중공의 관계가 69년 3월 국경 무력 충돌로까지 악화되자 중공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소위 ‘데탕트’의 시대를 열면서 대소련 관계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다만 1970년대와 현재 상황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에는 중공과 소련 간의 관계가 상호 주적으로 여길 정도로 악화된 관계였으나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영향력 축소라는 목표를 공유하여 밀착 관계에 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양국 간에 불신과 이해관계의 상충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양국은 2000년대 초반에 국경 획정 조약을 체결하여 ‘이제 양국 사이에 국경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공식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은 19세기에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사실상 ‘빼앗은’ 땅, 즉 아무르강 북안 지역과 연해주에 대해 그 지역을 수복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나 중국 역시 미국을 상대하는 데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여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러시아로서는 극동 지역의 경제적 저개발 상태를 극복하고 어떻게 인구를 늘릴 것인가의 심각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해 중국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강력히 대응할 능력을 러시아는 갖고 있으나 중국이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오는 데는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것이 고민이다. 만주 지역의 인구는 1억명 정도가 되나 인접한 러시아 지역은 인구가 고작 수백만에 불과하여 인구의 ‘삼투압’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그간 중국 측이 아무르강의 여러 지점에 다리를 건설하자고 제의하여도 러 측은 묵묵부답이었다가 최근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속속 다리들이 개통된 바 있다. 또한 아무르강 주변 하바롭스크 주에서는 국경지대의 대규모 농지를 중국 기업들에 임차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중국 흑룡강성과 길림성에서 출발하여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 운반되는 화물에 대해서 중국 측이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자국 국내 항구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5월에는 숙원 사업인 두만강을 통한 동해로의 출해권 허용 문제의 해결을 위해 러시아 측의 상당한 양해까지 확보하였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 수십 년간 극동 러시아 지역 개발을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외국인 투자 유치도 부진하였다. 그럼에도 전에는 러시아가 중국 기업들의 진출에 대해서 내심 반기지 않는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었으나, 이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의 요청과 요구에 부응하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70년대 초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는 분명히 갈등의 소지가 상존하고 있다. 극동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리고 평화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 눈에 쉽게 띄지는 않으나 러시아로서는 그러한 현상이 고착되면 역전시키기가 어렵다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투자 유치 및 주변국과의 경제협력 활성화를 목적으로 2015년부터 매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방경제포럼을 개최하고 푸틴 자신이 매번 참석하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실적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우크라이나 전쟁은 극동 러시아의 경제발전에 투입해야 할 자원을 빨아들이는 악재이다.
2024년 러시아와 북한이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맺었는데 안보 협력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협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극동지역에 있어 협력 파트너를 다양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난 9월에는 북한의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연결하는 두만강 자동차 다리가 착공한 지 1년여 만에 신속하게 개통되었다. 러시아가 잠재적 안보 위험을 극복하고 이 지역을 보전하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 내 세력균형 유지라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러시아 극동을 위한 대안, 한국
그러면 미국이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대한 우려를 해소해 줄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런 역할은 한국이 할 수 있다. 한국은 현재 중국이 러시아 시장에 제공하고 있는 것들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반 소비재는 물론이고 조선·에너지 운송·해양기술, 자동차·기계·전자·산업설비, 석유화학·정유·소재 산업, 농업·식품 가공·물류에서 충분히 중국을 대체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 기업이 극동 러시아 지역에 활발히 진출하게 되면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의존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러시아에 유인을 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제재 완화 또는 해제뿐이다. 이는 제한적이며 러시아로서는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미국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명확한 신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와 거래할 때 고려하는 위험은 단순히 미국 법률을 위반해 처벌받을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제재 대상과 거래했다는 의심만으로 달러 결제, 국제 금융망, 보험, 해운 서비스 등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거래 은행이 자체적으로 거래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지난 3월 한국 정부가 러시아산 나프타 거래와 관련해 미국 측으로부터 비(非)달러 결제에 대한 확인을 받았다는 보도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진출에 대한 의지도 있고 준비도 되어 있다. 미국은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만 조성해 주면 된다. 현재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 및 경제협력 재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나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자세는 다분히 미국의 대러 정책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에 대해 명시적인 시그널을 준다면 유럽연합이 반발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 미국의 이익이다
미국이 제공하는 이익이 충분하지 않으면 러시아는 중국과 관계를 계속 긴밀하게 유지할 것이므로 러시아를 그냥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도 국가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을 활용할 수 있고, 한국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관계는 미국, 한국 그리고 러시아 세 나라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간 러시아 외교부 고위당국자의 발언을 보면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경고를 하면서도 한국과의 협력 재개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그러한 협력이 재개되고 심화된다면 한국으로서는 경제적 이익을 얻고 안보 측면에서는 러·북 밀착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도 있다. 나아가 미국의 양해를 구할 수 있다면 남·북·러 삼각협력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게 극동지역 개발은 국가적 과제이고, 미국에게 중국 견제는 역시 국가적 목표이다. 한국 정부는 이 점을 미국 정부에 제안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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