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전월세 안심신탁', 46년 만에 전제를 바꾼다

김광중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클라스한결
김광중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클라스한결]
 
주택임대차보호법 땜질 46년
1981년 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스물아홉 차례 개정됐다. 대항력에서 시작해 소액보증금 우선변제권, 확정일자에 의한 우선변제권, 임차권등기명령, 계약갱신요구권이 차례로 더해졌다. 방향은 언제나 같았다. 임차인의 채권을 그 주택에 더 단단히 붙들어 매거나, 임차인이 미리 확인할 정보를 늘리는 것이었다. 어느 개정도 '보증금은 임대인이 받아서 보관한다'는 전제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달 22일 임대인·임차인 모집공고로 첫발을 떼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월세 안심신탁'은 46년 만에 처음으로 그 전제에 손을 대는 대책이다.

구조는 이렇다. HUG 안에 전월세안정화기구를 두고, 임차인은 보증금을 임대인이 아니라 이 기구에 예탁한다. 임대인은 그 운용수익을 연 4%대의 월 수익으로 매달 받는다. 계약이 끝나면 기구가 임차인에게 직접 보증금을 반환한다. 보증금은 HUG가 보증하는 주택 건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투자된다. 연 15조원을 예탁받아 약 9만3000세대의 공급을 뒷받침하고, 장기적으로 100조원 펀드로 8.9%인 공공임대 재고율을 20%까지 올리겠다는 구상이다. 이달 22일 모집공고에 이어 11월 전세가 검증과 약정 체결, 12월 잔금 예탁과 입주가 예정된 일정이다.
 
왜 임대차제도의 전제를 바꾸는 일이 중요한가?
지금 제도에서 보증금을 담보하는 것은 오직 그 집 한 채다. 복수의 담보도, 보증인도 없다. 그러면서 임차인은 그 유일한 담보를 통제하지 못한다. 임대인이 근저당을 더 설정해도, 세금을 체납해도, 집을 넘겨도 막을 수 없다. 대항력은 다음 날에야 생긴다. 금융회사라면 차주를 심사하고 담보인정비율을 규제하며 담보가치가 떨어지면 추가 담보를 요구한다. 임차인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한 채 수억 원을 무이자로 개인에게 빌려준다. 사기가 없어도 보증금이 떼이는 이유다. 전세사기는 이 구조가 낳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보증금을 임대인에게 맡기고 임대인이 이를 마음대로 쓰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상식이지만, 비교해 보면 대단히 이례적이다. 독일은 보증금을 월 차임의 3배로 제한하고 임대인이 자기 재산과 분리해 예치하도록 하며 그 이자는 임차인에게 귀속시킨다. 임차인에게 불리한 약정은 무효다. 영국은 통상 5주분을 정부가 인가한 보호 스킴에, 호주와 뉴질랜드는 주 정부기관에 맡기게 하고, 미국 뉴욕주는 신탁으로 보유하되 고유재산과 섞지 못하게 한다. 보증금을 작게 제한하거나 임대인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우리는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매매가의 60~70%에 이르는 보증금에 상한도, 제약도 없다. 이는 우리 법제 안에서도 이례적이다. 투자자예탁금은 고유재산과 구분해 예치하거나 신탁하게 하고, 퇴직급여는 사외에 적립하며, 상조 선수금은 절반을 보전하게 한다. 민법은 유치권자와 질권자가 담보로 잡은 물건조차 채무자의 승낙 없이 쓰지 못하게 한다. 법원은 임대보증금을 임차인의 모든 채무를 담보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임대인은 그 전액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 허용된다.

HUG의 안심신탁에서는 임대인이 도산해도 채권자가 집행할 수 있는 것은 임대인의 수익권뿐이다. 임대인이 조세를 체납해도, 주택이 매매나 경매·공매로 넘어가도, 선순위 근저당이 얼마이든 임차인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주택으로 보증금 반환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뒤에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다.

지난 16일 HUG가 연 토론회에서는 사장이 직접 발제를 맡았다. 순수 월세와 비교한 월 수익, 공실이 나도 두 달까지 보장되는 수익, 보증 가입의무 면제, 임대소득세 감면 추진처럼 임대인이 계산기를 두드릴 항목을 유형별로 내놓았고, 이면계약 우려처럼 의문점들도 목록을 만들어 답을 했다. 필자는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여해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맡긴다는 주택임대차 제도의 전제를 46년 만에 처음으로 바꾸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짚었다.

당장 달라지는 것부터 보자. 임차인은 등기부를 열람해 선순위 담보와 순위를 따지고, 등기부에 나타나지 않는 체납을 걱정하고, 경매 낙찰가를 예측할 필요가 없어진다. 확정일자와 전입신고 시기를 하루 단위로 맞출 이유도, 사는 동안 소유자가 바뀌었는지 살필 이유도 없다. 보증금이 임대인에게 가지 않으니 갭투자도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전세가 사라진다는 염려
임대인이 보증금을 쓰지 못하면 전세가 사라진다는 염려는 기우다. 전세 공급 물량은 오히려 늘 수 있다. 서울 연립·다세대 중위가격으로 매매가 3억원, 전세가 2억원인 주택을 보증금 1000만원의 월세로 놓으면 임대인의 월 수익은 74만원, 안심신탁에 참여하면 73만원이다. 차이는 1만원인데 임대료 미납 위험이 사라지고 공실이 나도 두 달까지 HUG가 수익을 보장한다. 선순위 근저당 2억원이 잡힌 3억원짜리 주택은 지금은 전세로 내놓을 수 없다. 임차인도 원하지 않는다. 낙찰가가 2억 4000만원이면 임차인이 받을 돈은 4000만원뿐이기 때문이다. 안심신탁이라면 같은 주택에 2억원의 전세가 가능하다. 우선변제권을 줄 이유가 없으니 임대인도 담보가치를 온전히 쓴다. 선순위 담보 탓에 월세로만 나오던 물건이 전세 물량이 될 수 있다. 월세 비중이 68.4%까지 오른 지금, 전월세전환율 6.7%와 전세대출금리 3.97%의 차이만큼 주거비도 내려간다.

임차인 쪽에서도 우려가 있다. 우선변제권을 내려놓고 기구를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 돈을 PF에 투자한다는데 부실이 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우선 비교 대상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보증금은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지 않다. 전액이 임대인 개인에게 넘어가 아무런 심사도 감독도 없다. 비교 대상은 위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의 상태다. 투자 대상은 HUG가 보증한 PF 대출이고, 임대인에게 지급되는 수익률은 투자 실적과 무관하게 일정하도록 설계돼 있다.

임대인이 참여하겠느냐, 2016년 은행권 전세금 에스크로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2016년의 실패는 임대인에게 돌아갈 운용수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익이 있고, 근저당 탓에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웠던 임대인에게는 수익률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선택제로 출발해 결국 의무화로 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전면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만 그것은 별도의 입법 절차를 거칠 일이고,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시장의 검증이다.
 
임대보증금 1058조원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장기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돈의 방향이다. 안심신탁에 들어가는 보증금은 주택의 공급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이 돈이 임대인에게 흘러가 갭투자와 다주택 취득의 종잣돈이 되고, 그것이 집값을 올리며, 오른 집값이 다시 전셋값과 보증금을 밀어 올린다. 이 제도가 완전히 정착돼 전체로 확대되면 우리나라 임대보증금 총액 1058조원의 물길이 달라진다. 갭투자에 활용되어 주택가격 상승을 불러오던 악순환에서 벗어나 보증금을 산업자본으로 돌려 국가경제의 선순환을 이끌 수 있다.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보완할 점도 있다. 우선 법적 성질이다. 이름은 '신탁'인데 발제자료와 보도자료는 '예탁'이라는 표현을 쓴다. 단순한 예탁이라면 법적 성질은 소비임치(민법 제702조)에 머문다. 맡긴 금전의 소유권은 기구로 넘어가고 임차인은 반환채권을 가진 일반채권자가 된다. 기구에 문제가 생기면 임차인은 다시 배당을 다투어야 한다. 반면 신탁법 제22조 제1항은 신탁재산에 대한 강제집행과 담보권 실행, 보전처분, 체납처분을 모두 금지한다. 도산격리는 약정이 아니라 법률이 부여하는 효과다. 예탁금의 법적 성질과 도산격리 여부를 법률로 분명히 해야 한다.

임대인이 받을 돈도 예측 가능해야 한다. 임대인의 관심은 하나다. 얼마를 언제 받는가. 수익률 산정 공식과 최저 지급 수준, 지급일을 모집공고에 명시해야 한다. 안심신탁 물건임이 임차인의 검색 단계에서 드러나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플랫폼과 중개 시스템에 표시가 붙으면 임차인이 먼저 찾고, 그 순간 임대인의 참여 유인이 생긴다. 이면계약으로 전세금을 부풀리려는 시도는 이 제도의 가장 현실적인 위험이므로 전세가 검증도 철저해야 한다. 초기 사고 건수를 공개하는 일도 중요하다. 안심신탁 물건에서 단 한 건의 미반환도 없었다는 사실만큼 강력한 설득은 없다.

안심신탁이 자리를 잡으면 그 다음은 우리 임대차제도 자체를 개편해야 한다. 보증금 반환을 금융기관이 담보하면 우선변제권이 필요 없어지고, 확정일자와 전입신고, 임차권등기명령, 반환보증보험처럼 우선변제권을 지키려고 쌓아 온 장치들도 함께 불필요해진다. 주택의 소유권과 사용권이 비로소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다. 수탁 주체도 늘려서 시장의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임대인이 수탁의 주체를 지정할 수 있도록 은행과 증권회사로 넓히되 국가가 그 건전성과 운용상품의 범주를 감독하면 된다. 그래야 예탁 규모가 커져도 감당할 수 있고, 운용 대상을 조정해 돈의 물길을 설계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전세가율이 높은 위험 주택부터 적용해 전체 임대주택으로 넓혀 가고, 종국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증금 운용수익에 대한 세제 지원은 한시적 유인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일부여야 한다. 확정일자를 다루던 지자체의 행정 인력도 돌봄처럼 지금 더 필요한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주택을 빌리는 일은 계약의 문제가 아니라 주거권의 문제다. 주거권은 다른 기본권의 실현을 떠받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살 곳이 불안하면 나머지 권리는 그 위에 세워질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46년 동안 그 권리의 실현을 개인의 지식과 운에 맡겨 왔다. 어렵고 복잡한 제도는 그 자체로 불평등을 낳는다. 등기부를 읽고 낙찰가를 가늠하고 순위를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위험을 피하고, 그럴 여력이 없는 사람은 그 위험을 떠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할 일은 어렵고 복잡하고 위험한 제도를 그대로 둔 채 국민들이 알아서 잘 살피라고 당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듯 쉽고 안전하게 살 집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전월세 안심신탁이 그 시작이다. 46년 만에 겨우 꿴 첫 단추가 제대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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