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바야흐로 정전협정 73주년이다. 한반도에 전쟁으로 인한 포성이 멎은 후 한 사람이 태어나 노인이 될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무수한 사건과 사고들이 남과 북 사이 분단이라는 나이테에 아로새겨졌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근간을 흔들 만한 선언은 2023년 말 정전 70년이 되는 해에 북에서 나왔다. 저들이 소위 ‘조국해방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던 동족 개념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더욱이 적대적 교전(전쟁) 상태는 그대로 두고 ‘조선’과 ‘한국’ 두 국가 관계로 전환하겠다는 모순적 행태를 기어이 개정 헌법이라는 제도 안에 들여놓았다. 김정은 시기 주창해온 핵보유국 지위 확립과 ‘우리 국가제일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때때로 단일대오를 흩뜨리는 대남관계에서의 절연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북한에서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적으로는 1946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부터 사용된 오랜 전통의 ‘남조선’ 호칭은 이제 ‘대한민국’(한국)으로 대체되었다. 호칭의 차이는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반영하기에 긍정과 부정을 떠나 북한의 대남관계의 제도적 전환은 분단 이후 남북관계사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분단체제라는 것은 상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상대가 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는 행위는 관계 맺음의 시작이자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가장 기본적인 선언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한반도에서 상대방의 이름은 늘 정치적 검열과 이념적 적대감의 전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 체제는 오랫동안 ‘북괴(北傀)’로 지칭되며 실체가 부정당했고, 냉전 완화 이후에도 오직 남한 중심적인 방위 개념인 ‘북한’이라는 호칭 속에 갇혀 있었다. 북괴가 북한으로 첫 표기되었던 '국방백서 1989' 발간 당시 군 내부의 거센 반발과 반대로 북한 역시 우리를 향해 ‘남조선 괴뢰’라 부르며 정통성을 부인해 온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과 국가 정체성의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상술했듯이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공식화했고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지우고 남쪽 국경의 범주에 대한민국을 명시했다. 남한 사회 내부에서도 통일부 장관이 공식 학술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한·조(한국·조선) 관계’로 표현하며,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약칭 ‘조선’) 사용을 공론화하자고 제안해 뜨거운 여론의 중심에 섰다. 이제 통일이라는 민족적 지향 아래 평화적 공존을 위해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는 방안을 호칭에서부터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미 1991년 9월 24일 남북한이 유엔(UN)에 동시 가입한 직후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기조연설을 통해 "이번 총회에서 대한민국과 함께 우리의 형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나는 북녘의 우리 형제들과 평화와 통일의 길을 함께 걷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하며 그들의 가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그의 발언은 국내적으로 헌법 제3조 위반이나 용공행위로 내몰리지 않았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는가? 혹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는가?
물론 남한 사회 내부에서 북한을 ‘조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북한을 ‘조선’으로 공인해 주는 순간, 대한민국 헌법 제3조(영토 조항)와 남북관계발전법상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법적 틀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북한이 남북 관계를 민족 동질성마저 부정하는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의 국호를 불러주는 것이 자칫 북한의 분단 고착화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는 민족과 통일에 부정적인 이들이라 할지라도 북한을 조선으로 호칭하는 것에 반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호칭이 가진 외교적·전략적 유용성을 경직되게 해석한 결과다. 상대의 국호를 불러주는 것은 결코 그들의 이념을 찬양하거나 체제적 불법 행위를 묵인하겠다는 동조의 의미가 아니다. 서독이 통일 전 정부 공식표기와 언론을 통해 동독을 독일민주공화국(DDR)으로 호칭하면서도 일상적으로는 민족적 구어체인 ‘저쪽(Drüben)'으로 혼용했던 사례도 일면 참고가 될 것이다. 다만 ‘북한’이라는 호칭이 들어간 실정법-‘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북한인권법’- 등은 존치하거나 여론 수렴 절차와 함께 법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기술적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
북한은 이미 유엔에 가입된 엄연한 독립 주권국가이며, 국제무대에서 ‘DPRK’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북한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내재적 연구방법 또한 기실 북한을 알기 위함이었지 조선을 알기 위함이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상대를 객관적인 연구 대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왜곡 없는 실효적 대북 전략이 수립될 수 있다. 비록 3년 전 북한이 상호 존중의 의미로 대한민국을 호명하지 않았을지라도 분단체제하에서 80년 가까이 소비해온 ‘북한’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서 의의는 적지 않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국민 정서와 헌법적 논란을 고려한 공론화 과정-정부와 언론, 학계, 시민사회 참여-이 필수이다. 적어도 국제체육대회, 유엔총회, ASEAN, ARF 등 국제 다자 무대에서는 국제적 관례와 국내 언론의 보도·제작 준칙에 따라 North Korea보다는 DPRK로 호칭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개적 공간에서 호칭 관례가 안착되면 국내 사회적·학술적·문화적 분야로 점진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는 9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부터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북한 선수단이 호칭 문제로 항의하며 기자회견장에서 퇴장하는 촌극은 더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상대방의 국호 존중은 대화와 공존의 최소한의 외교적 신호로서 ‘조선’이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데서 시작되는 평화의 문법이 적어도 한반도 상황을 지금보다 악화시키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중요하다.
한기호 필자 주요 이력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사)북한연구학회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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