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고유가 쇼크와 기록적인 엔저라는 '쌍둥이 악재'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경제 정책, 곧 다카이치노믹스를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다. 다카이치 정권이 8000억 엔(약 7조5452억원)의 예비비를 투입하며 물가 방어에 나섰지만, 보조금 확대가 재정 악화와 엔저 가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미국과 유럽의 강경한 긴축 기조에 밀린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시그널 역시 엔저 흐름을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다. 위기가 기업의 비용 부담을 넘어 실질 임금에까지 전이되면서, 저성장과 고물가의 그늘이 깊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 민간 이코노미스트들이 2026년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1.8%에서 평균 2.1%로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고 25일 보도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로 원유 조달 리스크가 커지자, 일본 내 일반 휘발유 전국 평균 가격은 리터당 190.8엔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에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은 24일 국무회의를 통해 2025년도 예비비 중 약 8000억 엔을 휘발유 보조금 기금에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리터당 30.2엔의 보조금을 통해 소매 가격을 170엔 정도로 억제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다이이치세이메이경제연구소의 신케 요시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기업들이 자원 가격 상승을 명분으로 '편승 인상'을 하기 쉬운 환경이라 보조금만으로 물가를 잡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소니파이낸셜그룹의 미야지마 다카유키 선임 이코노미스트 역시 "보조금이 불어나 재정이 악화되면 엔저가 가속화되고, 이는 다시 수입 가격을 높여 보조금을 더 늘려야 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앞서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에너지 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 악화를 매우 우려한다"며 "실질적인 진전이 보이지 않는 한 금리 인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역시 에너지 가격 상승의 "2차 파급 효과를 면밀히 감시하겠다"며 긴축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미 정책 금리가 중립 수준에 도달해 동결만으로도 물가 상승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미국·유럽과 달리, 일본은행(BOJ)은 통화 완화 기조를 유지해온 탓에 엔저 압박을 방어할 정책적 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정책 격차를 의식한 듯 우에다 가즈오 총재는 지난 19일 "기조 물가 경로에 영향이 없다면 당연히 금리 인상은 가능하다"고 밝히며 통화정책 정상화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매파적 연출'은 시장에서 실질적인 구두 개입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우에다 총재 스스로가 미·유럽 중앙은행과 달리 유일하게 경기 침체에 따른 기조 물가 하락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 아니라, 정책위원회 내부에서조차 물가 상승을 경계하는 매파적 의견이 '근소한 차이로 우세한 정도'에 그쳤음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이는 긴축에 대한 확고한 컨센서스를 이룬 미·유럽과 달리, 일본은행 내부에서는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비둘기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여 과감한 금리 인상이 어렵다는 시그널로 해석됐다.
결과적으로 주요국 간 통화정책 격차는 엔저 압력을 키우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에너지 쇼크 이후 ECB는 연내 3회 추가 인상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고,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는 소멸한 반면, 일본은행은 연내 2회 수준의 완만한 인상 관측에 머물며 정책 대응 속도 차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미·유럽과의 금리 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엔화 가치는 1달러당 160엔대를 위협받고 있으며, 이는 고유가였던 2022년 당시(130엔대)보다 수입 물가 압박 면에서 훨씬 가혹한 조건이다.
여기에 지난 23일 일본 의회에서 금융 완화와 적극 재정을 지향하는 '리플레파' 성향의 신임 심의위원 임명안이 최종 통과된 점도 통화 당국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요인이다. 재정 확대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다카이치 정권 하에서 인적, 정치적 제약에 직면한 일본은행이 엔저 해소를 위한 공격적인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이러한 복합 위기는 민생 경제의 핵심인 '임금'에까지 전이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6년도 실질임금이 1%대 플러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낙관했으나, 중동 분쟁발 고유가가 장기화될 경우 실질임금은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가 발표한 올해 봄철 노사 임금협상(춘투) 1차 집계 결과, 임금 인상률이 5.26%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물가 지속으로 현장의 위기감은 오히려 고조되고 있다.
그나마도 이러한 수치는 대기업 위주의 결과일 뿐, 진짜 위기는 한 달 뒤인 4~5월에 협상이 집중되는 중소·영세 기업들이다. 그간 인재 확보를 위해 실적 개선 없이도 임금을 올려온 '방어적 인상' 기조를 유지해온 중소기업들에게 고유가와 고물가는 치명적이다. 지불 여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원가 부담까지 가중될 경우, 중소기업발 임금 정체는 피하기 어렵다. 중동발 에너지 쇼크가 기업 이익을 갉아먹고 소비 위축을 부르는 악순환은 임금 인상을 통해 경제 체질을 바꾸려던 다카이치노믹스에 큰 위기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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