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집을 옮기려니 갈 만한 매물이 없고, 차라리 집을 사려니 은행 문턱이 높다. 월세로 돌아서면 매달 나갈 돈이 부담이다. 결국 지금 집에 남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세입자들이다. 오래 살고 싶어 머무는 것과 갈 곳이 없어 눌러앉는 것은 다르다. 주거정책이 구별해야 할 안정과 불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2030년까지 공적주택 119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주거안정플랜을 내놨다. 공공이 임차인의 주거를 더 책임지겠다는 방향은 옳다. 그러나 전세 이동도, 내 집 마련도 막힌 세입자에게 필요한 것은 장기 총량에 앞서 다음 계약 만기를 넘길 방법이다. 119만가구라는 큰 숫자가 지금 닫힌 주거의 퇴로를 얼마나 열어줄 수 있는가.
119만가구는 모두 새로 지어 곧 입주할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공공분양과 공공지원민간임대까지 포함하고 건설형은 착공, 매입형은 매입·약정, 전세임대는 계약을 기준으로 집계한다. 정부의 공급계획에서는 나란히 한 채지만 세입자가 기다려야 할 시간은 다르다. 기존 집을 공공이 매입하거나 빌려 임대료를 낮추는 것도 필요한 주거복지다. 다만 공공의 지원이 늘어나는 것과 시장에 집이 새로 늘어나는 효과를 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정부가 별도로 제시한 올해 4분기부터 내년 말까지 입주 가능 물량은 전국 15만가구, 수도권 10만가구다. 이를 세입자의 실제 선택지로 바꾸려면 생활권과 가구 규모, 감당할 수 있는 임대료까지 맞아야 한다. 아이 학교와 직장을 떠나야 하거나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공급 목록에 있어도 갈 수 없는 집이다. 기존 공급대책과 겹치는 물량과 새로 늘린 물량도 분명히 가려야 한다. 같은 집이 대책에 두 번 등장한다고 선택지가 두 배가 되지는 않는다.
보편형 공공임대의 도입은 그래서 중요하다. 역세권·도심에 넓고 질 좋은 집을 공급해 중산층까지 오래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집을 사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야 대출을 끌어모아 매수해야 한다는 압박도 덜 수 있다. 그러나 19만가구 목표와 달리 소득·자산 기준과 임대료는 연내 발표로 미뤘다. 보편형이라는 이름보다 세입자에게 급한 것은 내가 대상인지, 얼마를 내야 하는지다. 취약계층 물량을 유지·확대하겠다는 약속도 재원과 실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공공주택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민간 전월세 시장에서 살아야 한다. 이들을 위한 대책을 공급계획 뒤로 밀어서는 안 된다. 전세를 구하지 못해 매수를 알아보는 무주택자에게 대출 문까지 닫히면 남는 것은 월세 부담을 감수하거나 이사를 포기하는 일이다. 집값과 가계부채를 관리할 필요는 있다. 그렇다고 실수요자의 주거 이동이 막히는 비용을 정책의 불가피한 부작용쯤으로 넘길 수는 없다.
대출을 무조건 풀자는 얘기가 아니다. 상환능력을 심사하는 것과 은행의 총량 관리로 대출 창구가 닫히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무주택자의 실제 이사·매수 수요가 어디서 막히는지 국토부와 금융당국이 함께 점검하고, 상환능력 범위 안에서 필요한 자금이 제때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국토부의 공급 목표와 금융당국의 대출 관리가 각각 성과를 내더라도 세입자의 선택지가 사라진다면 주거 안정에는 실패한 것이다.
주거급여와 월세 지원 확대를 앞당기고, 기존 공공임대의 빈집을 수요에 맞게 연결하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입주자 선정 기간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실행하고, 지역별 입주 일정과 자격·임대료를 공개해 세입자가 이사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공공임대 확대와 민간 임대차시장의 계약 안정, 실수요 금융을 함께 다뤄야 한다.
정부의 시간표는 2030년까지지만 세입자의 계약 만기는 그 전에 돌아온다. 세입자가 이사를 포기해 거래가 줄었다면 이를 시장 안정이라 부를 수는 없다. 119만가구의 약속은 갈 곳 없는 세입자에게 실제로 갈 수 있는 집이 생길 때 비로소 대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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