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극한 혹서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는다. 유럽은 위도가 높고 해양성 기후인 덕분에 여름에도 비교적 큰 더위 없이 지내왔다. 최신식 빌딩이 아니고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 유럽 자동차에는 에어컨이 없다. 최고급차인 벤츠나 BMW도 유럽에서는 에어컨이 선택사항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여름철 더위가 예년 같지 않고 오히려 해마다 더 심해진다. 더위 먹고 사망하는 사례도 해마다 증가한다. 이에 가정에 에어컨을 설치하려 해도 실외기 설치 허가를 받으려면 모든 이웃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유럽 대도시들은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 에어컨 설치로 인한 건물 훼손 문제도 심각하다. 이들 문제를 해결해도 설치비용이 1000만원 넘는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아파트를 비롯한 가정집에도 에어컨이 설치된 사례가 거의 없다가 지금은 25% 정도지만, 영국과 독일은 아직도 6%에 그친다. 90%를 넘는 한국·미국·일본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여름철 파리지엔들은 휴가를 떠나고 관광객만 넘쳐나는데 정작 에어컨 없는 파리의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는 후덥지근하기 그지없다. 오죽했으면 프랑스에서는 에어컨 자유 설치를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정당도 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나 가정집뿐만 아니라 소형 자동차까지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과거 우리나라 시내버스에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최병렬 서울시장 재임 중 민심탐방 차원에서 시내버스를 타 보았더니 너무 더워서 모든 시내버스에 에어컨을 설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문명의 이기인 에어컨이 아니고는 더위 나기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실내뿐만 아니고 실외 문제도 심각하다. 아직까지는 더워도 열사의 나라 중동의 두바이처럼 차에서 내리자 말자 바로 에어컨이 켜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정도는 아니다. 비록 땀도 나고 다소 덥기도 하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는 된다. 더위가 갈수록 심해지자 서울시는 ‘그늘도 기본권’이라는 기조 아래 ‘그늘보행권’을 서울 도시정책의 기본 원칙으로 도입하고 시내 전역을 잇는 그늘길을 조성하기로 했다. 공공보행통로를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 ‘생활 그늘길’을 만들기 위해 그늘이 필요한 곳을 정확히 ‘찾고’, 장소의 여건에 맞게 ‘만들고’, 시민의 일상 동선을 따라 끊김 없이 ‘잇는’ 3단계 전략으로 생활권 그늘길을 조성할 방침이라고 한다.
가로수와 정원, 건물 그늘, 캐노피, 어닝, 공개공지와 공공보행통로를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 개별 시설의 '점'을 '생활권 그늘길'이라는 '선'으로 잇고자 한다. 그늘길의 핵심은 가로수다. 여름에 가로수가 우거진 길을 걸으면 햇살을 차단해 주기 때문에 더위를 피해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가로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대로변 인도라도 천차만별이다. 한 아름 가득한 오래된 플라타너스·느티나무·은행나무 등으로 이어지는 가로수 길은 너무나도 시원하고 아늑하다. 대로변 가로수는 인도와 차도 사이에 위치한 가장 전형적인 가로수다. 게다가 인도와 건물 사이에 수목이 줄을 잇고 있는 가로수 길은 가로수가 겹겹이 쌓여 산책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이다.
다른 한편 차도와 인도 사이의 가로수도 메말라 버려 역할을 못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심지어 알 수 없는 이유로 가로수가 베어져 나가 가로수 길이 뚝 잘려버리면 한여름의 땡볕에 그대로 노출된다. 심지어 가로수가 건물과 그 건물의 상호를 가린다고 약물을 주입해 죽이는 일까지 비일비재하다. 특히 인도와 건물 사이에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도의 가로수와 건물의 가로수가 이중으로 있는 길은 예외적이고 오히려 인도에만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면 사유지 건물 앞에 가로수를 심어놓은 건물주만 손해를 보는 셈이다. 도심 녹지와 공원 조성을 책임지는 관공서에서는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아마도 원래 건축을 할 당시에는 모든 건물 앞에 가로수를 심도록 했기에 이들이 가로수를 식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로수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물주도 있는 반면에 가로수를 싹둑 베어버린 건물주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모든 건물에는 녹지조성이 의무사항이다. 그런데 크고 작은 건물들에는 건축허가만 받고 나면 녹지는 주차장이나 창고로 변용된다. 이들 모든 가로수나 녹지에 대한 관리·감독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늘보행권에서 그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늘보행권은 '그늘+보행'을 합친 권리라는 측면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된다. 보행의 자유와 권리를 제대로 확보해 주기 위해서는 인도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우선 인도가 반듯하고 깨끗해야 한다. 오래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자치단체장과 함께한 자리에서 필자는 거창한 한·일 교류에 중점을 두기 이전에 일본의 장점을 최대한 학습할 것을 권한 바 있다. 바로 일본의 인도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의 인도만큼 깨끗한 도시는 찾기 어렵다. 일본의 인도는 가정집 안마당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깨끗하다. 깨끗함 못지않게 인도는 반듯하다. 울퉁불퉁한 한국의 인도와 다른 점을 배워야 한다. 수시로 보도블록을 교체하고서도 며칠만 지나면 울퉁불퉁해지는 엉터리 보도블록 작업은 바로 잡아야 한다. 심지어 교체된 보도블록의 일부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한 흔적도 보인다. 보도블록 교체 작업에도 작업자의 실명제가 도입되어야 한다. 게다가 인도 보행에 가장 큰 장애물은 불법 주차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문명국가를 판명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인도에 불법주차가 있느냐의 여부라고 본다. 인도(人道)는 말뜻 그대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사람이 다니는 데 불편하게 하고 장애물이 있다면 이는 인도가 아니다.
인도를 제대로 가꾸고 지켜야 보행통행권도 확보된다. 차제에 인도를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주요 도시의 모든 대로변 인도를 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관리하는 방안이다. 모든 공무원들에게 일정 지역을 담당하게 하는 인도 관리 실명제를 실시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 공공건축물 공사에도 실명제를 도입한 사례가 있다. 인도 관리 실명제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실명 관리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도시미관을 위하여 일정 규모 이상의 모든 건물에 조각물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설치 이후 모든 조각물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인도와 조각을 동시에 관리하면 더 좋을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지만 대부분은 헌법 아래 법률상의 권리이다.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항들이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기본권이 된다. 헌법상 기본권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나도 당연히 누리는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 헌법상 기본권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전을 거듭한다. 18세기 말 근대시민 혁명 이후에는 인간의 천부인권적인 자유권이 중심을 이루었다. 하지만 19세기 산업혁명의 성공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이 재조명되면서 생존권·사회권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된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에서는 최초로 헌법에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즉 생존권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그때 ‘인간다운 생활’을 구현하고자 한 내용의 핵심은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수요, 즉 의식주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간의 삶이 풍요해지면서 물질적 생존에서 더 나아가 환경적 생존 및 문화적 생존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는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야기되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회환경 파괴에 대응한 헌법적 의지의 표현이다. 이에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법적 권리로 머물던 환경권도 이제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권리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 헌법에 환경권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즉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5조 제1항). 하지만 여전히 환경과 관련된 권리는 사법적 권리로 치부되면서 헌법상 환경권의 범주를 넓히는 데 매우 인색하였다. 환경권의 내용으로서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항이 일조권(日照權), 즉 사람이 사는 집에 일정한 햇빛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5조 제3항)라고 하여 쾌적한 주거생활을 강조한다. 대도시에서 심각한 주택문제가 이젠 헌법상 의지를 더 높여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기본권으로서 주거기본권이 요구된다(성낙인, '헌법상 주거기본권에 기초한 부동산정책[한국의 창]', 한국일보 2026.4.29.). 즉 주거기본권을 단순히 환경권의 일부가 아니라 비록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늘보행권도 이제 사법상의 권리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그늘기본권’으로 정립함으로써 국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자유와 권리로 격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면 에어컨향유권도 새로운 권리로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에어컨향유권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에어컨향유권과 그늘기본권은 넓은 의미의 환경권의 일종으로 포섭할 수 있다. 주거기본권은 환경권으로부터 독자적인 기본권, 즉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으로서 주거기본권 창설도 가능한 시대에 이르렀다. 주거문제는 이미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명제로 대두되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늘보행권은 서울시에서 직접 제시한 권리이므로 상당한 수준의 공법상 권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래도 그늘보행권을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기본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좀 더 숙고와 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주거권이 주거기본권으로, 그늘보행권이 그늘기본권으로 발전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바로 헌법상 기본권이 되지는 않더라도 생활 속에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와 권리, 기본권 또는 국민주권 등 거창한 논리를 앞세운 정치적 수사보다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사안들을 직접 해결하는 생활기본권, 민생기본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국민주권시대, 시민주권시대를 실질적으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주인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나 지방권력으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생활 속의 기본권 보장과 더불어 생활 속의 법치도 동반하여야 한다.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사안일수록 엄격한 법의 집행을 통하여 생활법치를 정립하여야 한다. 그늘보행권에서 그늘기본권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법과 원칙을 엄중하게 적용하는 생활법치가 필요하다.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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