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사랑을 잃어본 사람이라면-영화 '윤희에게'

  • 스스로를 잃고 용서하지 못한 삶에서 햇빛으로 나아갈 때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사진=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웃음기 없이 무표정한 윤희(김희애)는 한 대학 급식실에서 조리보조로 일하고 있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처럼 윤희의 삶은 조용하고 건조하게 흘러간다. 윤희의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할 것 없고 담담하다. 그 안에는 이젠 바스라진 어떤 희망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새봄(김소혜)은 깊게 담배를 들이마신 뒤 마치 공허함이라는 연기를 내뱉는 듯한 엄마 윤희를 향해 묻는다. “엄마는 뭐 때문에 살아?” “자식 때문에 살지.” 새봄의 아빠는 새봄에게 말한다. “엄마는 다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야.”

수많은 학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윤희는 어딘가 오래전부터 무언가가 멈춰있는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늘 옅은 그늘져 있고 이는 중년의 피로나 이혼의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공허함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오래전 이야기다. 젊은 시절 일본인 여성 쥰(나카무라 유코)을 만나 사랑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던 시대에서 윤희는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결국 윤희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넘어 자기 자신까지 함께 잃어버린 뒤 공허함 속에 살아왔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남편과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며 윤희는 지워져갔다.

어쩌면 윤희의 딸이 ‘새봄’인 것은 자신을 미워하던 감정에서 나아가 얼어붙은 자신의 세계를 뚫고 결국 새로 다가오게 될 봄에 대한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윤희를 결국 빛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사람은 새봄이다. 일본에서 엄마에게 발송된 한 통의 편지, 새봄은 엄마에게도 뜨거웠던 시간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 직감한다.

조용히 눈 내리는 마을 일본 오타루로 새봄은 윤희를 데려가고, 오래전 윤희의 마음에 있던 쥰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윤희는 조금씩 잃어버렸던 자신의 시간과 마주한다. 
 
[사진=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사진=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 늦은 순간이란 없다

이 영화는 재회보다 감정의 복원에 집중한다. 영화속 가장 유명한 대사인 "우린 잘못한 게 없으니까"는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닌 두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했던 죄책감을 해방시키는 선언에 가깝다.

'윤희에게'는 퀴어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또한 엄마라는 역할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희에게’는 사랑을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 눈 내리는 거리와 조용한 골목, 그리고 긴 침묵과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사랑한다고 외치지 않아도 사랑이 느껴지고, 그립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리움이 전해진다. 

영화는 퀴어 서사라는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가 한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은 잘못된 것인가, 가정을 이루면 행복할까, 엄마가 되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가. 

영화 속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관객은 스스로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엄마로 살아오느라 잊어버린 이름, 세상의 시선 때문에 감춰야 했던 마음,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빛나던 순간을 다시 한번 꺼내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에 남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한 사람이 스스로를 용서하고 햇빛으로 걸어가는 순간을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 너무 오래 묻어 있어 빛바랜 듯 보이지만 찬란했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탓하는 사람이라면 이젠 스스로를 용서할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에 삶에서 늦은 순간이란 없다.
 
사진영화 윤희에게 포스터
[사진=영화 '윤희에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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