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통상 질서는 기존 규범에 기반한 다자무역 체제에서 국가별 경제 안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때 자유무역과 규범 기반, 단일 시장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유럽연합(EU)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과 관세 문제로 대서양 통상 관계도 조정 국면을 맞고 있으며, 중국발 공급과잉은 철강, 자동차, 풍력 등 유럽 제조업의 경쟁 환경을 어렵게 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가 ‘경쟁력 나침반’을 발표하며 미국·중국과 혁신 격차 해소, 대외 의존도 축소를 핵심 과제로 제시한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우선 미국 변수는 유럽의 통상·산업정책 추진에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고조된 관세·무역 갈등은 양측이 관세 상한 설정에 합의하며 일단락된 듯하나 긴장감은 여전하다. EU 역외 수출에서 약 20%를 차지하는 미국은 EU의 핵심 시장이다. 추가 관세 자체도 부담이지만 더 큰 문제는 미국의 압박과 반복되는 고율 관세 위협이 유럽의 투자와 수출 전략에 지속적인 불확실성을 안긴다는 점이다.
중국발 변수는 산업 현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EU는 중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받은 제품들이 유럽에 대량 유입되며 역내 제조업에 피해를 초래한다고 판단하여 전기차 상계관세 등 산업 보호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방어 수단은 무역구제 조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EU는 역외보조금규정(FSR)을 근거로 제3국 정부의 보조금이 EU 내 투자와 공공조달 시장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관련 조사는 전동차, 태양광 프로젝트 등에 참여한 중국 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EU의 보호무역주의적 색채는 철강, 방산 등 주요 산업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철강 세이프가드 이후 유럽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하는 철강 수입 관세할당(TRQ) 제도는 수입 쿼터를 대폭 축소하고, 쿼터 초과 물량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메이드 인 EU(Made in EU)’ 또는 ‘바이 유러피안(Buy European)’ 정책 기조도 확산하는 분위기다. 특히 올해 초 제안된 산업가속화법(IAA)은 주요 전략 분야에서 유럽산 제품과 역내 생산 기반을 우대하는 정책 수단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EU의 통상정책이 단순히 보호주의로만 기울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EU는 역내 전략산업을 선별적으로 보호하되 외부와 통상 네트워크는 더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EU는 올해 1월 메르코수르와 무역협정에 서명한 데 이어 인도, 호주와도 협상을 타결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으로 FTA 체결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무조건적인 시장 개방이라기보다, 경제 안보와 산업 경쟁력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EU의 기준을 충족하며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에게 시장과 협력의 공간을 넓히겠다는 의도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 기회 요인이 될 수 있다. EU 입장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적 관계 속에 상호 협력적 기반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될 여지가 크다. 한국과 EU는 2011년 FTA 발효 이후 무역과 투자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해 왔으며 디지털 전환, 그린 산업, 첨단 제조업 등 공통의 협력 분야도 넓다.
특히 배터리, 반도체, 전력기기, 자동차 부품, 의약·바이오, 친환경 소재 분야에서 한국 기업은 EU가 필요로 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다. 유럽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생산 기반을 강화하려 하고 있지만 모든 전략산업을 단기간에 자체적으로 구축하기는 어렵다. 결국 EU로서도 우수한 기술력과 양산 경험, 안정적인 공급 역량을 갖춘 파트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EU 시장을 단순한 수출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현지 생산, 공동 연구개발(R&D) 등으로 협력 수준을 업그레이드하여 유럽 산업 생태계의 일부로 깊숙이 자리 잡는 것이다. 또한 협력 과정에서 공급망 실사 대응, 탄소 규제 준수, 재활용·순환경제 체계 구축 등 EU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EU가 요구하는 진입장벽은 높지만 역으로 이를 충족하는 기업에는 오히려 가장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시장 기회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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