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호의 기원상 칼럼] 투표용지는 없고 책임자도 없다

3일 서울 송파구 잠실2동 6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일 서울 송파구 잠실2동 6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중단됐다. 이번 6·3 지방선거는 두고두고 기록될 만한 사건이 됐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선거는 국가가 수행하는 수많은 행정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업무다.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져야 국민은 결과에 승복하고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이 특별히 독립기관으로 규정할 정도로 높은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정작 선거의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인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 광진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떨어져 투표가 지연됐고 유권자들이 장시간 줄을 서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도 투표가 계속 진행됐다. 선관위는 사과했다. 하지만 사과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선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투표용지는 선거의 핵심 물품이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다. 투표함이 없거나 기표용구가 없거나 투표용지가 부족한 상황은 애초에 발생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그것은 마치 병원 수술실에 수술도구가 없거나 공항 관제탑에 통신장비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관위의 대응이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자 중앙선관위는 시·도 선관위의 책임을 언급했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중앙선관위는 전국 선거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선거관리의 최종 책임은 중앙선관위에 있다.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중앙은 책임이 없고, 시·도 선관위가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국민은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선관위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대선 당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자 투표 과정에서 투표용지를 바구니와 쇼핑백에 담아 운반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 2023년에는 전·현직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졌고 감사 과정에서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하나의 사건만 놓고 보면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유형의 논란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민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수가 한 번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같은 조직에서 계속 문제가 반복된다면 국민은 조직의 운영 방식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2동 제6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하러 온 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 2동 제6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하러 온 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선관위는 그동안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외부의 간섭을 거부해 왔다. 물론 선거관리기관의 독립성은 중요하다. 정권이 선거를 좌우하는 상황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독립성이 책임 면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독립성이 강할수록 책임도 강해야 한다.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외부 견제를 받지 않고,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반복적으로 사고가 발생하는 조직이라면 국민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관위원장 제도에 대한 논란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현재 중앙선관위원장은 대법관이 겸임하는 비상임 체제로 운영된다. 관행적으로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아 왔다. 그러나 선거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가 사실상 본업이 따로 있는 비상임 체제라는 점은 오래전부터 문제로 지적돼 왔다. 실제 선관위 업무는 사무총장이 총괄하고 위원장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물론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는 것이 곧바로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체제가 국민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선거가 끝난 뒤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누가 준비를 했고, 누가 보고를 받았으며, 누가 최종 결정을 했고, 누가 책임질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금 선관위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신뢰로 움직인다.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도 결국 선거 절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몇 장의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품는 국민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선거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선관위가 반복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면 그 주장이 힘을 얻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더 위험하다. 민주주의는 음모론이 아니라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그 신뢰를 지키는 것이 선관위의 존재 이유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로 덮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누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 왜 투표용지가 부족했는지, 현장 보고 체계는 제대로 작동했는지, 중앙선관위는 무엇을 했는지 철저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책임질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선거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선거관리기관이라면 존재 이유를 스스로 묻게 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그리고 그 꽃을 가꾸는 정원사가 선관위다. 정원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꽃은 시들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투표용지 부족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선거관리 시스템 전체에 울린 경고음이다.

“기·원·상 칼럼은 아주경제의 사시인 ‘기본·원칙·상식’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와 세계 흐름의 본질을 짚어내는 대표 오피니언 칼럼입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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