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지정학, 기술, 금융이 동시에 충돌하는 ‘복합 위기’의 시대에 들어섰다. 과거와 같은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 전환기에서 한국 경제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현 전 부총리는 “이제 경쟁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며, ‘포용적 혁신 국가’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그의 진단과 해법은 단순한 정책 제안을 넘어 한국 경제의 미래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경제 관료의 길을 선택하신 배경과 당시 시대적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핵심 원리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국가 주도의 압축 성장’입니다. 당시 한국은 자본도 부족했고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 맡겨서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직접 시장을 설계하고, 효율성보다는 속도에 방점을 두고 경제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그 기반에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설계 능력, 둘째는 교육과 인적자본에 대한 집중 투자, 셋째는 사회 전체가 공유한 공동체적 희생 정신입니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되면서 단기간에 고속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성장 모델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 일부 요소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추격형 성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미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기술을 선도하고, 창의적인 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동시에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격차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포용적 성장’이 중요합니다. 즉, 단순히 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균형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현재 한국 경제의 강점과 구조적 한계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 한국 경제는 교육 수준과 디지털 인프라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이는 분명한 경쟁력입니다. 그러나 구조적 한계도 분명합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 그리고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지속 성장을 위협하는 요인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잠재성장률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경기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제도 개혁 없이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세계 경제를 ‘복합 위기’라고 진단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 과거의 위기는 특정 사건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충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나 유가 파동 같은 경우죠.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지정학적 갈등, 기술 패권 경쟁, 기후 변화, 금융 불안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불확실성의 고착화’라고 표현합니다. 즉, 위기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지속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단순한 경기 대응으로는 부족하고, 시스템 전체의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중동 리스크와 같은 지정학적 충격은 한국 경제에 어떤 경로로 영향을 미칩니까.
= 가장 먼저 유가 상승을 통해 물가를 자극합니다. 이후 물가 상승은 금리 인상 압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를 위축시킵니다. 동시에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서 금융시장 불안도 확대됩니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수출 중심 경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결국 실물과 금융 양쪽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별 정책이 아니라 거시 리스크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최근 강조하신 ‘경제안보’ 개념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요.
= 경제안보란 경제력이 곧 국가 안보의 핵심 요소가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군사력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같은 전략 산업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됐습니다. 공급망이 흔들리면 경제뿐 아니라 안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산업 정책, 외교 정책, 안보 정책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합니다. 이는 단기 대응이 아니라 중장기 전략 차원의 문제입니다.
한국 경제는 추격형 모델을 넘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 핵심은 ‘플랫폼형 경제 구조’로의 전환입니다. 과거에는 특정 산업에 집중 투자해 성장하는 방식이 효과적이었지만, 이제는 산업 간 융합과 생태계 기반 성장이 중요합니다. 특히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혁신의 중심이 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정부는 데이터와 AI 인프라를 지원하고, 규제 환경을 개선해 기업 생태계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결국 혁신은 특정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서 만들어집니다.
부동산과 자본시장 흐름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자금이 부동산에서 주식시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긍정적인 구조 변화입니다. 이는 단순한 투기 이동이 아니라 자산 배분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자본시장이 성숙 단계에 들어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만 과도한 레버리지, 특히 ‘빚투’와 같은 현상은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정책적으로는 생산적 투자로 자금이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향후 20년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입니까.
= 저는 ‘신뢰의 경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속도의 경쟁이 아니라 방향의 경쟁입니다. 과거처럼 빠르게 따라가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합의와 신뢰입니다. 정책의 일관성, 제도의 안정성, 그리고 시장과 정부 간의 신뢰가 구축될 때 비로소 장기 성장이 가능합니다. 한국 경제는 이미 큰 성과를 이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 현오석 전경제부총리: 현 부총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시경제 전문가이자 정책 설계자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거쳐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을 시작했으며, 이후 세계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3년에는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임명돼 한국 경제 정책 전반을 총괄했다. 개발경제 시기부터 선진경제 진입 단계까지 한국 경제의 전환을 현장에서 경험한 몇 안 되는 인물로 평가된다. 국제기구 경험과 정책 실무를 겸비한 그는 한국 경제의 구조 개혁과 중장기 전략 설계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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