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컬럼 / 한국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김승연 회장의 선택은 사람이다

  • -50년 천안 북일고가 말하는 기업의 미래

기업의 힘은 숫자로만 남지 않는다. 매출과 이익, 자산과 시가총액은 한 시대의 성과를 보여주지만, 한 기업이 어떤 철학으로 세상을 대했는지는 숫자 바깥에서 드러난다.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키우는 일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니라, 기업이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가장 긴 시간의 투자이기 때문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4일 충남 천안 북일고등학교 개교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남긴 메시지도 그런 점에서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김 회장은 방명록에 “국가 인재 양성의 뜻을 이어온 50주년을 기념하며 배움과 성장의 열정이 가득한 북일 100년의 미래를 만들자”고 적었고, 기념사에서는 “지난 50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선배들이 이룬 북일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미래를 이끌어 나갈 리더로 성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학교 관계자와 재학생, 교직원, 동문 등 13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4일 충남 천안 북일고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4일 충남 천안 북일고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북일고의 출발부터가 그렇다. 북일고는 한화그룹 창업자인 고(故) 현암 김종희 회장이 1976년 “학교 교육은 국가 백년대계의 근본적 초석이 된다”며 무제한 장학금을 기부해 설립한 학교다. 이 문장은 지금 읽어도 묵직하다. 기업이 사업을 일으켜 부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부를 다시 교육으로 돌려 사람을 키우겠다는 결단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업가가 공장을 세우는 것과 학교를 세우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은 다르다. 공장은 이익을 만들고, 학교는 시간을 만든다. 공장은 오늘의 생산을 책임지지만, 학교는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키운다.
 
 
이 지점에서 김승연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단지 창업자의 뜻을 기념한 것이 아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도 유효한 기업 철학으로 다시 확인했다. 김 회장은 1981년부터 2014년까지 북일학원의 제2대 이사장을 맡았다. 북일고와 북일여고가 명문 사학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 오랜 시간 관여했다는 뜻이다. 많은 기업들이 창업자의 유산을 말로만 기린다. 하지만 말은 쉽게 휘발된다. 반면 제도는 남는다. 학교는 남고, 졸업생은 남고, 교육을 통해 길러진 태도와 역량은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김승연 회장이 지켜온 것은 단순한 학교 운영이 아니라, 기업 철학의 제도화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기업가정신을 흔히 모험, 결단, 투자, 확장 같은 단어로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산업에 먼저 뛰어들고, 위기 속에서 큰 결정을 내리며, 남들이 주저할 때 판을 키우는 능력은 분명 기업가의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래가는 기업은 결국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좋은 인재를 알아보고, 기회를 주고, 실패를 견디게 하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기업의 외형은 커져도 깊이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
 
 
김승연 회장의 이번 북일고 방문이 갖는 상징은 여기에 있다. 배움과 성장, 인재와 미래를 강조한 메시지는 한화라는 기업이 무엇으로 지속성을 확보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업 포트폴리오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때는 화학이 중심이 되고, 어떤 때는 방산이 전면에 서며, 또 어떤 때는 에너지와 금융이 기업의 축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의 밑바탕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산업은 바뀌어도 사람의 중요성은 바뀌지 않는다. 기술은 사 올 수 있어도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키우는 기업만이 길게 간다.
 
 
한국 기업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도 여기 있다. 인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즉시 성과’만 요구하는 문화다. 채용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하지만, 현장에서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사람만 찾는다. 교육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비용 절감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줄이는 항목 중 하나가 교육훈련이다. 인재를 육성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성과의 도구로 보는 시선이 여전히 강하다. 이 구조 속에서 기업은 사람을 쓰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을 키우는 데는 충분히 인내하지 못한다.
 
 
반대로 북일고 50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교육은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점이다. 학교 하나를 세워 50년을 이어간다는 것은 해마다 결산서에 드러나는 성과와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를 내다보는 일이고, 오늘의 효율이 아니라 내일의 가능성을 믿는 일이다. 기업가에게 이런 시간 감각이 있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눈앞의 수익률보다 멀리 가는 힘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픽노트북LM
[그래픽=노트북LM]

 
여기서 김승연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확장’보다 ‘축적’의 언어로 읽힌다. 새로운 사업을 인수하고 해외 시장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업을 지탱할 사람의 기반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일은 더 중요하다. 학교를 세운 창업자의 뜻을 이어 학교의 50년을 함께 기념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100년의 미래를 말한 것은, 결국 기업의 내일이 사람의 성장 속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북일고 50주년은 북일학원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기업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의 기업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실적표의 숫자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다음 세대가 딛고 설 발판까지 남길 것인가. 기업이 단지 돈을 버는 조직에 그친다면 오래 기억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을 키우는 조직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학교와 장학, 교육과 훈련, 배움과 성장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기업의 이미지를 넘어 기업의 수준을 결정한다.
 
 
김승연 회장이 북일고에서 보여준 메시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묵직하다. “배움과 성장의 열정이 가득한 북일 100년의 미래를 만들자”는 말은 단순한 축사가 아니라, 기업이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에 가깝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은 사람에서 나오고, 사람의 경쟁력은 교육에서 나온다. 그래서 기업의 미래는 공장보다 교실에서 더 오래 준비된다.
 
 
50년 북일고는 한 기업이 교육을 통해 남긴 시간의 기록이다. 그리고 100년 한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이름이다. 그 미래를 여는 힘도 결국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얼마나 빨리 쓰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얼마나 오래 키우느냐. 기업의 품격은 바로 거기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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