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다시 반도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번에는 단순한 추격이 아니다. 메모리 중심의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차원을 넘어,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인 차세대 프로세서·추론 반도체·국가 주도 제조 생태계를 한꺼번에 묶어 판을 다시 짜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일본경제신문이 3월 31일 보도한 후지쓰의 1.4나노급 NPU 개발 계획은 그 상징적 장면이다. 보도에 따르면 후지쓰는 AI 추론용 NPU 개발을 추진하고, 일본 정부 지원 아래 래피두스(Rapidus)에 생산을 맡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아직 공식 확정 발표로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 뉴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반도체는 다시 기업의 제품 경쟁을 넘어 국가의 산업 체력 경쟁으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후지쓰의 반도체 전략은 이미 윤곽이 나와 있다. 회사는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2나노 Arm 기반 CPU ‘FUJITSU-MONAKA’**를 준비 중이며, 공식 자료에서 이 칩은 TSMC 2nm 공정과 3D 칩렛 구조를 전제로 설명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후지쓰는 2029년 이후를 겨냥한 MONAKA-X 계열에서 CPU와 NPU 결합, 1.4nm 공정, Fugaku NEXT 적용, GPU 협업까지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후지쓰가 보는 미래는 CPU 따로, GPU 따로가 아니다. AI 시대에 맞게 범용 연산, 추론 가속, 초고성능 컴퓨팅(HPC)을 한 시스템 안에서 묶는 구조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AI 반도체 경쟁은 엔비디아 GPU가 사실상 표준을 장악해왔다. 학습과 추론 모두 GPU가 주도했고, 시장도 그 흐름에 맞춰 움직였다. 그러나 AI 산업이 커질수록 병목이 분명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력이다. 데이터센터의 비용 구조는 이제 서버 가격만이 아니라 전력 조달, 냉각, 운영 효율이 함께 좌우한다. 이런 맥락에서 NPU 같은 추론 특화 반도체는 특정 워크로드에서 더 높은 전력 효율을 기대할 수 있어 주목받는다. 후지쓰가 MONAKA와 MONAKA-X를 설명하면서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키워드 역시 성능만이 아니라 전력 효율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본의 방식이다. 일본은 한 회사의 신제품 개발에 머물지 않고 설계-생산-정책-보조금을 한 축으로 엮고 있다. 후지쓰가 설계를 하고, Rapidus가 차세대 제조 거점으로 떠오르며, 일본 정부와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가 재정과 제도 측면에서 받쳐주는 구조다. 동시에 후지쓰는 현실적으로 2나노 MONAKA는 TSMC를 활용하고, 차세대 국내 생산 카드는 Rapidus와 연계하는 식의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다. ‘자국 중심 공급망’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당장 가능한 글로벌 협력과 장기적 자립 기반을 함께 가져가겠다는 계산이다.
한국은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는 반도체 강국이지만, 그 강점은 여전히 메모리 초격차에 크게 기대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LSI를 두루 갖췄고, SK하이닉스는 HBM 경쟁력으로 AI 시대의 핵심 공급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일본 후지쓰 사례가 던지는 경고는 분명하다. AI 시대의 승부는 메모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설계 역량, 추론용 칩, 첨단 패키징, 전력 효율, 제조 생태계, 소프트웨어 호환성까지 다층 전쟁이 되고 있다. 한국이 ‘삼성과 SK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버티기에는 판이 너무 커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구조다. 첫째, 팹리스와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을 실질적으로 키워야 한다. 둘째, AI 반도체를 단순한 칩 산업이 아니라 전력·냉각·데이터센터 인프라 산업과 묶어서 봐야 한다. 셋째, 반도체를 개별 기업의 투자판단에만 맡기지 말고, 장기 국가 프로젝트로 끌고 갈 축이 필요하다. 일본이 보여주는 것은 ‘기업 지원’이 아니라 ‘국가 프로젝트의 재가동’이다. 그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질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삼성과 SK라는 세계적 기업을 보유하고도, 정작 산업 전략에서는 자주 기업 실적 논리에 갇힌다. 하지만 반도체는 이미 안보다. 공급망이 흔들리면 산업도 흔들리고, AI 인프라가 뒤처지면 국가 경쟁력도 흔들린다. 미국은 보조금과 규제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일본은 정부와 기업을 묶어 재도전에 나서고, 대만은 여전히 최첨단 제조의 핵심 축을 쥐고 있다. 이 싸움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 것이 아니라 무엇을, 왜, 어떤 생태계로 만들 것인지를 국가 단위로 다시 정해야 한다.
후지쓰의 1.4나노 구상은 아직 계획 단계다. 그러나 계획일 뿐이라고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계획 뒤에 놓인 국가의 태도다. 일본은 반도체를 잃어본 나라다. 그래서 다시 찾기 위해 설계, 생산, 보조금, 안보를 함께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를 가진 나라다. 그런데 가진 것에 안주하는 순간, 먼저 미래 판을 짜는 나라에게 밀릴 수 있다. AI 반도체 전쟁은 더 이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국가 체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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