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의 기업가정신은 늘 전제를 바꾸는 방식이었다. 전기차는 자동차의 정의를 바꿨고, 민간 우주선은 국가 독점을 흔들었으며, 위성통신은 통신 인프라의 개념을 재구성했다. 이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뇌를 향하고 있다. 기술의 대담함만 놓고 보면 그의 행보는 일관적이다. 그러나 기업가정신의 평가는 도전의 크기가 아니라 책임이 어디에, 어떻게 고정돼 있는지에서 갈린다.
뉴럴링크의 BCI가 보여준 임상 성과는 분명하다. 중증 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디지털 도구를 조작한다는 사실은 의료 기술의 가능성을 현실로 끌어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머스크는 ‘가능함’에 머물지 않고 ‘양산’과 ‘완전 자동화’를 동시에 말한다. 이 순간 기술은 의료 혁신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제도로 진입한다.
기술사에서 이 지점은 낯설지 않다. 자동화는 효율을 높이지만, 실패의 순간에는 책임의 위치를 흐리기 쉽다. 항공 산업에서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될 때마다 반복돼 온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고 이후 기술적 원인은 비교적 빠르게 설명되지만, 신뢰 회복은 늘 더뎠다. 설명은 충분했지만, 책임의 주체가 분명해지기 전까지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경험은 의료 기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저 장
머스크의 선택은 이 관행과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합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 기술이 먼저 길을 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방식이 산업을 앞으로 끌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의 도전은 늘 사회에 질문을 남긴다. 준비되지 않은 책임의 구조를 누가 떠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기본과 상식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찬반이 아니다. 머스크가 이 기술의 실패 가능성까지 자기 이름으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자동화된 수술이 성공했을 때의 성과는 기술과 시스템의 몫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알고리즘의 판단이었다”는 말은 기업가정신의 언어가 아니다. 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책임 역시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오래된 격언 하나가 이 장면을 정리한다.
“권한이 있는 곳에는 책임이 따른다.”
기술이 권한을 확장할수록, 책임은 더 분명하게 고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신은 진보가 아니라 위험으로 기록된다.
뇌에 컴퓨터를 심는 세상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이 선택이 인류의 도약으로 남을지, 경고의 사례로 기록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 답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이 선택의 무게를 누가 끝까지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가정신은 언제나 그 지점에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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