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올해 안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25일 오후 미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한마디는 한·미정상회담 간 진행된 소인수회담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역협상 등을 비롯해 양국 간 풀어내야 할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이 메시지는 평양을 향한 비교적 명료한 사인이었다. 이 순간 아마도 정상회담 직전 트루스소셜에 올라온 글로 가슴을 쓸어내렸던 방미 팀 누군가는 기대했던 반응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며칠간 숨가빴던 이재명 대통령의 대일, 대미 외교는 막을 내렸지만, 새 정부의 한반도 외교는 이제야 본궤도에 올라섰다. 대략 지난 한 달간 한국이 미·일·중을 상대로 ‘발로 뛰는’ 외교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이 북한은 연일 ‘말로 받아치는’ 날 선 외교로 응수했다. 어쩌면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한 두 코리아 간 방식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를 상대로 끊임없이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남과, 체제의 폐쇄성과 경제제재로 인해 두 발이 땅에 매인 채 다른 한쪽을 바라봐야 하는 북,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말 김 위원장이 선언한 적대적 두 국가, 이른바 ‘조한관계’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던 북한이라 연속적인 입장표명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2022년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발표될 때만 해도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자던’ 북한이 남쪽의 동향을 과잉 의식(self-conscious)하는 상황을 두고 ‘네거티브 반응 그 자체로 보자’는 측과 ‘반복되는 네거티브의 행간을 읽자’며 평창올림픽을 앞두었던 2018년 1월과 같은 반전을 기대하는 측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북한이 ‘의식의 금기’를 깬 첫 시작은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였다. 지난 7월 28일 이재명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가 골자였다. 우리 정부는 긴장 완화와 인도주의라는 투 트랙(two track)의 관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대북 조치들을 시행해왔다. 내용을 보면, 집권 일주일 만인 6월 11일,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지했고 6월 29일, 석모도 해안에서 북한주민 추정 시신의 인도를 요청했다. 7월 5일, 국정원은 52년 만의 대북방송 송출 중단을 순차적으로 단행했고, 7월 9일에는 비자발적 탈북어민 6명을 의사에 따라 동해상에서 북으로 송환 조치했다. 북의 첫 담화 이후에도 일련의 조치들은 계속되었다. 신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7월 30일,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던 우리 국민의 북한 주민 접촉신고 처리 지침의 폐기를 알렸고, 8월 4~5일, 우리 군은 대북 확성기 20여 대를 철거했다. 이틀 후인 8월 7일, 합참과 한미연합사는 한미연합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 연습 계획(8.18~28) 중 야외기동훈련(FTX) 20여 건을 9월로 연기할 것을 발표하였다. 8월 14일, 북이 다시 반응했다. ‘을지 자유의 방패’의 일부 변경과 확성기 철거 등을 잔꾀로 치부하며 ‘허망한 개꿈’이라 일축했다.
다음날 진행된 이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새 정부 대북정책의 기본 골격이 ‘싸울 필요없는 상태, 즉 평화’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계기였다. 경축사에 담긴 주요 단어들의 빈도는 △평화(12회) △대화(6회) △분단(5회) △전쟁(3회) △인내(2회) △통일(1회) 순이었다. 이른바 대북 3원칙인 △체제 존중 △흡수통일 未추구 △적대행위 금지를 제시하였고, 현 남북관계를 과거 남북기본합의에 기반한 평화적 통일 지향의 ‘잠정적 특수관계’로 정의함에 따라 두 국가론 수용을 거부하였다. 특히 남북간 기존 합의의 존중 차원에서 가능한 사안은 곧바로 이행할 것을 확약하였다. 9·19 군사합의의 선제적 복원과 상호 교류 간 ‘공리공영·유무상통 원칙’(2007.10.4.선언 명시)을 재소환하였다. 무엇보다 ‘핵 없는 한반도’ 언급 시, ‘북미’가 아닌 ‘미북’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이 대통령은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8.21)에서 동결-축소-비핵화의 3단계 북핵 해법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였다. 북한보다 미국을 앞서 호명한 것은 분단 당사자인 우리의 역할이 제한되니, 미국이 직접 해결사로 나서달라는 의미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북·미 양자 정상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복선(伏線)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관계를 언급하며 이번 가을 경주 APEC 회의에 그를 초청하는 것을 ‘매우 슬기로운 제안’으로 평가했다.
광복절 경축사 사흘 뒤인 8월 18일, 통일부는 지난해 윤석열 정부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시되었던 ‘8·15 통일독트린’의 폐기를 발표했다. 이튿날 김 위원장은 한·미군사훈련을 비난하는 입장을 내었고, 김여정 부부장은 이 대통령의 경축사 등 대남 현안을 외무성 국장급 회의에서 다루었다. ‘대조선 유화공세’ 이면에 여전히 대결 야망이 있으며, ‘이 대통령이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위인이 아니다’라는 논조에 대해 일각에서는 한·미정상회담을 의식한 뉘앙스로 수용했다. 이 때문인지 북한은 고강도 도발을 자제한 채 지도자급 담화 없이 8월 25일, 개인명의로 한·미·일 3각 군사공조에 대한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비난하고, 8월 27일에는 이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 방미기간 진행된 CSIS 연설을 조목조목 힐난하는 조선중앙통신 명의 논평을 발표하였다.
우리 외교에 대한 북한의 반작용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 대통령이 협상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 피스메이커(Peacemaker)의 ‘지위’를 부여하고 페이스메이커(Pacemaker)를 자처한 전략은 평가할 만하다. 지난 칼럼에서도 우리 정부가 북·미협상의 견인자보다는 조력자(Policy Advisor)로의 조정이 불가피함을 강조하였다. 이제는 운전자석에서 양자를 견인하던 시기를 지나 차에서 내려 좌우를 살피며 달릴 때이다. 하프코스 이하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는 간혹 거리와 시간이 체크된 노란 풍선 등을 달고 참가자들의 페이스를 조절하며 완주를 돕는 봉사자들이 있다. 노련한 프로 마라토너들이 이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하는데 자신의 페이스를 희생하고 보조를 맞출수록 참가자들에게 우리 편이라는 인식을 심게 되고 완주율도 높일 수 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12차례 등장한 ‘평화’보다도 2차례 등장한 ‘인내’였다. 당장은 제한된 남북관계 하에서 한반도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페이스메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인내와 완주를 향한 완급조절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통일학 박사 ▷통일부 과장(서기관)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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