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미국이 제시한 상호관세 부과일이 임박했다. 72번째 정전협정일에 언론 지면은 평화 아닌 관세협상 기사로 가득하다. 연일 ‘승전’ 분위기를 띄우는 북한과 달리 트럼프 2기 들어 ‘미지(未知)의 워싱턴’을 상대하는 한국은 여유가 없다. 관세협상과 별개로 동맹의 가치는 가치대로 견지해나가야 한다. 이는 한·미간 새 FTA 체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 한국이 북·미정상회담을 조심스레 지원해나갈 수 있었던 원천은 두터운 한·미동맹이었다. 판문점 선언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에게,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했다. 6년 반이 흘렀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난 6월 북한이 트럼프의 친서 수령을 거절했다는 한 미국 매체의 보도는 북·미 정상의 만남을 낙관하기에 저마다의 셈법이 한층 복잡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번 글에서는 북·미정상회담에 관한 양국간 요인들을 진단하고 우리의 역할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미국 요인이다. 미국의 북·미회담 성사를 위한 외교적 환경은 트럼프 1기 당시보다 씨줄, 날줄로 엉켜있는 상태다. 미·중전략경쟁과 러-우전쟁은 물론, 이-중동전쟁과 미 주도의 관세무역 ‘전쟁’은 북·미회담에 대한 외교적 초점을 크게 흐리고 있다. 당면 이슈들이 일부 해소된다면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은 상승하겠지만 올해 안에 여건이 갖춰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반면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트럼프의 성격(personality)은 회담성사 가능성을 높이는 동력이다. 미국 안보의 오래된 짐을 덜어냈다는 외교안보적 치적 또한 그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유인이다. 다만 내년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 측근과 공화당 내 로열티 이탈 기류도 변수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북한 문제를 힘을 앞세워 윽박지르는 이란식보다는 외교적 접근 방식을 택할 것이다. 유사시 서태평양지역의 주요국가들이 연루됨에 따른 부담은 물론, 양안지역 급변사태 시 사실상 핵보유국이자 NPT 미가입국인 북한의 전략적 행동도 한·미에 적잖은 변수가 될 수 있다.
북·미회담 추진을 위한 중·러 등 주변국 역학관계의 복합성도 들여다봐야 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냉전시대의 조지 케넌이나 헨리 키신저의 대러 봉쇄전략의 중국 버전(逆키신저)은 성공률이 희박하다. 섣부른 대러 포용책은 미국과 유럽 및 나토세력 간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미국이 다극 질서 가속화를 주도한다는 지적은 착시가 아니라 현실이며. 중국이나 러시아는 이와 같은 흐름을 관망하거나 역이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미국이 일극질서를 주도할 예전의 힘과 의지 없이 대부분의 외교적 사무를 미국우선주의적 비용으로 환산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려스럽다. 정치경제적 함의를 지닌 한반도 문제 역시 북·미회담 이후의 대북 경제적 효용성(대북 관광산업 투자, 대규모 인프라 개발 등)에만 착안하고 있다면 합의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들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 2기 북·미협상은 하노이 노딜 이후 진입장벽 자체가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경색된 남북관계 하에서 우리 정부가 과거와 같은 촉매자 역할을 하기도 어렵다. 이에 따라 트럼프는 푸틴에게 그 역할을 요청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북한이 당장 협상장에 나서거나 10월말 경주 APEC에 참석하여 미국을 상대할 가능성은 낮다. 북·미회담의 진입장벽에 대한 부담은 김정은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은 여전히 8월부터 예정된 한(일)미연합훈련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으므로 한·미간 모종의 변화가 있다면 반응할 여지는 남는다.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볼턴이 주창했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는 더는 유효하지 않다. 협상테이블이 차려진다면 비핵화 목표에 관한 단계적 접근보다는 △핵무기프로그램 동결 △핵보유량 제한에 따른 △미국 및 국제사회의 제재완화 협상에 관한 동시적·병행적 이행이라는 요구사항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살펴본 바 우리 정부는 북·미협상의 견인자보다는 조력자(Policy Advisor)로의 조정이 불가피하다. 단기적으로는 관세 및 방위비협상 간 한·미관계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전작권 환수나 독자적 핵개발 관련 여론이 미칠 파장도 고려해야 한다. 한·미군사훈련 유예는 대북 협상의 입구가 되는 협상카드인 만큼 한·미간 사전 조율이 우선이다. 장기적으로는 이른바 ‘하노이’와의 결별도 필요하다. 북한은 트럼프가 아닌 미국을 상대로 할 것을 수차례 공언한 만큼 한국정부는 북·미회담 성사 자체보다 제네바합의 실패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북·미회담을 종전이나 평화협정과 무리하게 연계시키기보다 북·미간 협상 재개를 지원하면서 남한의 참여를 모색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영구적 정전체제가 아닌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미국이 추구하는 동북아지형에 경제정치적으로 절대적으로 유리함을 다면적 채널로 설득해가면서 트럼프의 관심사인 원산 갈마 지구 등의 개발 및 상업화를 통한 북한의 경제적 번영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에 한국을 포함한 다국적 파이낸싱 등을 선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향키를 다시 맡길 수 있나 묻는다면 현재로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필자 주요 이력
▷통일부 과장(서기관) ▷연세대 통일학 박사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교수(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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