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자유무역 체제에서는 '비용 절감'과 '효율화'가 공급망 전략의 핵심이었지만 미·중 기술패권 경쟁, 지정학적 갈등, 자원 무기화 등으로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이제는 경제안보 중심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공급망의 안정성 확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고, 공급망 회복탄력성의 중요성 또한 크게 부각되고 있다.
첨단기술 산업의 발전과 함께 주요 품목에 사용되는 원자재의 중요성 역시 높아지고 있다. 구리, 인듐, 니켈, 희토류 등 반도체, 이차전지, 방위산업 등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 수요는 급증하는 반면 공급은 특정 국가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원자재와 핵심 광물의 무기화로 공급망 교란이 심화되면서 현재 글로벌 사회는 지경학적으로 과거 냉전 시기보다 더 분절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는 주요 자동차 기업들이 생산 중단 위기를 겪을 정도로 큰 충격을 줬으며, 이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과 협상할 때 중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는 효과적 수단이 되고 있다. 중국은 수출통제법 및 희토류 관리조례 등을 통해 희토류의 채굴, 제련, 가공, 유통, 수출 등 공급망 전 과정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일회성 조치가 아닌 법률 기반의 구조적 전략으로, 향후에도 지속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동시에 희토류 영구자석은 전기 모터, 액추에이터 등 휴머노이드 로봇, 전기차에 많이 사용되므로 중국은 자국 내 폭발적으로 성장할 미래 산업의 수요에 대비해 핵심 자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전략적 접근을 병행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 관세정책 등을 활용해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전략 품목의 자국 내 생산을 유도하고 있으며, 희토류의 자체 생산도 시도하고 있다. 아울러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등을 통해 미국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장비의 대중국 수출도 제한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핵심원자재법(CRMA)을 통해 핵심 광물의 내재화와 동맹국 간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도입해 주요 기술·산업에 대해 정부 주도의 관리체계를 마련했다. 이처럼 각국은 자국 및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적극 추진하며, 법·제도·재정 지원을 통해 핵심 전략 자산 보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도체, 이차전지, 소부장 산업 등에서 글로벌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공급망의 '가시성'과 '대체 가능성' 확보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공급망안정화법, 소부장특별법, 자원안보특별법 등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범정부 차원에서 공급망 정책 대응 체계를 구축해 왔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2023년 '소부장산업 공급망센터'를 설립했으며 이 센터는 공급망 정보 수집·분석·전파, 조기경보시스템 운영 지원, 수입처 다변화 등 다양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격주로 뉴스레터 '글로벌 공급망 인사이트'를 발간해 글로벌 공급망 트렌드, 정책 동향 등을 분석하고 정책 수립자와 기업 관계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경제안보 시대에는 단순한 위기 대응을 넘어 미래 경쟁력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급망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산업공급망협의회를 통한 정책 제안, 제도 개선, 현장 의견 수렴과 애로 파악 등 소통체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의 글로벌 조달 역량 강화, 민관 연계의 위기 대응능력 향상 등 긴밀한 공조 체계를 지속적이고 발전적으로 유지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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