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시대가 열리면서 AI 학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슈퍼컴퓨터의 중요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럽도 엑사스케일(초당 100경 번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단일 시스템)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며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더는 뒤처질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민간 기업들도 자체 슈퍼컴퓨터 도입에 속도를 내며 AI 경쟁력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17일 과학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전 세계 4위 유럽 1위 슈퍼컴퓨터(2025년 6월 기준) '주피터' 구축을 위해 자사의 최상위 데이터센터GPU(그래픽처리장치)인 그레이스호퍼(GH)200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주피터는 약 2만4000장의 GH200칩을 병렬로 연결해 평균 793 페타플롭스의 성능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연합이 출자해 설립한 유로HPC(고성능컴퓨팅) 공동사업단 소유로, 독일 울리히 연구소 산하 울리히 슈퍼컴퓨팅 센터에서 운영한다.
페타플롭스는 초당 1000조번의 수학 연산처리를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위다. 보통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표현하기 위해 쓴다. 공식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슈퍼컴퓨터 성능이 1000 페타플롭스=1엑사플롭스에 도달하면 따로 엑사스케일 머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존 슈퍼컴퓨터와 처리성능의 격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미국 정부 산하 연구소들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엘 캐피탄(전 세계 1위), 프런티어(2위), 오로라(3위) 등이 여기 해당한다.
슈퍼컴퓨터는 과거 대규모 시뮬레이션 연산과 암호해독 등에 주로 활용됐으나 지금은 AI 학습에 활용하기 위해 도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때문에 미·중·일 등 패권 경쟁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로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 특수 연산에 특화한 전용 칩을 만들어 슈퍼컴퓨터를 구축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대량의 엔비디아·AMD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병렬로 연결해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조는 일반 PC와 마찬가지로 처리장치·저장장치·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 폰 노이만 구조를 따른다. 대신 시스템 규모를 대규모로 키우고 이를 특수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하나로 연결해 다수의 장치가 하나의 작업을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만든다. 전용 칩을 계속 연결해 특수 연산에 특화한 구조로 만들지 않고 일단 범용 칩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프로그램을 활용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게 대세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로 인해 슈퍼컴퓨터 업계에서 엔비디아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을 집계하는 톱500 프로젝트에 신규 진입하는 슈퍼컴퓨터 대부분이 엔비디아 GPU를 채택했다. 유로HPC가 2년 전부터 순차적으로 도입한 레오나르도(10위), 마레노스트럼(14·45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스위스국립슈퍼컴퓨팅센터의 알프스(8위)도 최신 엔비디아 GPU로 구축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엑손모빌, 아람코 등 전 세계 주요 IT·에너지 기업도 엔비디아 GPU를 활용해 사내 최신 슈퍼컴퓨터를 구축했다.
최근 삼성전자, 네이버, 카카오, SK텔레콤, KT 등 민간 기업 중심으로 슈퍼컴퓨터 도입이 활발한 한국도 엔비디아 선호가 뚜렷하다. 생성형 AI 학습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06 페타플롭스의 성능으로 전 세계 18위 한국 1위 성능을 갖춘 삼성전자 슈퍼컴퓨터 'SSC-24'도 약 4000장의 H100칩을 병렬로 연결해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 세계 1~3위 슈퍼컴퓨터는 엔비디아 대신 AMD·인텔의 GPU로 만들어졌지만, 이는 엔비디아 시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엔비디아 시스템이 AI 학습과 범용성 측면에서 우수한 만큼 슈퍼컴퓨터 업계에서 미국 외 타 국가 정부와 민간 기업의 엔비디아 선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20여년에 걸친 AI와 슈퍼컴퓨터에 대한 장기 투자가 오늘날 엔비디아의 성과를 일궈냈다고 평가한다. 엔비디아는 지난 2016년 자사의 첫 번째 슈퍼컴퓨터 시스템인 'DGX-1'을 공개했다. 데이터센터GPU V100 8개를 병렬로 연결해 1 페타플롭스의 성능을 내는 제품이다. 당시에는 미국·중국·일본 정부 산하 연구소 주도로 전용 칩을 개발해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는 게 대세여서 DGX-1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때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1위를 차지했던 중국 텐허, 선웨이 타이후라이트와 일본 후가쿠 등이 당시 흐름의 산물이다.
DGX-1의 첫 고객은 제품 발표 후 반년 만에 나왔다. 자사 슈퍼컴퓨터 첫 판매에 고무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차에 DGX-1을 싣고 제품을 직접 고객에게 전달했다. 그 첫 고객의 이름은 오픈AI다. 당시 오픈AI 임원이었던 일론 머스크는 자산의 트위터(현 엑스) 계정에 "컴퓨터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세계 최초로 DGX-1을 받았다"고 쓰며 흥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황 CEO는 지난해 초 슈퍼컴퓨터 시스템 DGX-H200을 공개한 후 첫 제품을 다시 오픈AI에 전달하며 양사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한편 반도체 업계에선 엔비디아가 앞서고 AMD·인텔 등이 추격하는 현 슈퍼컴퓨터 시장 구도로 인해 한국 기업들이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다고 분석한다. 세 회사가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자사 GPU에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이 만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적극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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