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G 공시 로드맵,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최근 한국 자본시장에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아주경제와 만나 현시점 국내 자본시장 문제점을 지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류 대표는 “한국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이 방향성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명확한 로드맵 마련과 평가 체계 고도화를 통해 오히려 지금이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ESG 산업의 수준과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ESG 공시와 관련된 정부의 가이드라인 발표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다소 일정 지연이 있었지만 이미 구체적인 로드맵을 확정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예컨대 일본은 2026회계연도 성과를 2027년부터 의무 공시하기로 했고 인증은 2028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홍콩 등 일부 국가는 2026년부터 ESG 공시를 시행한다. 유럽연합(EU), 호주 등 주요국들도 공시 일정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원래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ESG 공시를 도입할 계획이었으나 현 정부 들어 계획이 수차례 변경되면서 아직도 확정된 일정이 없다. 이는 오히려 기업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ESG 공시 자체를 반기는 기업은 드물지만 최소한 일정을 명확히 정해주면 그에 따라 준비가 가능하다. 현재처럼 일정조차 불확실한 상황은 기업 입장에서 리스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ESG 공시 로드맵을 조속히 확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일본처럼 2026년 사업연도부터 공시를 시작하고, 인증은 2028년부터 시행하는 방안을 벤치마크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은 심지어 중국보다도 ESG 정책 추진 속도가 느린 상황이며 이대로라면 글로벌 ESG 흐름에서 점점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그에 따른 미국의 파리협약 탈퇴, 기후공시 정책 철회 등도 글로벌 ESG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U 역시 일부 ESG 정책에 대해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ESG를 느슨하게 대응해도 된다는 인식을 할 우려도 있다.
한국 산업은 디스플레이, 자동차,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반도체, 조선 등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이다. 이들 산업은 감축이 쉽지 않은 '난감축' 부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지금처럼 국제적 압박이 다소 완화된 시기에 저탄소 기술과 ESG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지금이 ESG 정책의 골든타임이다. 정부는 더 이상 로드맵 확정을 미뤄서는 안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 등 자본시장 보호 장치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보나.
"스튜어드십 코드는 원래 투자자 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다. 다만 정부가 지나치게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주주환원’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은 시장 자율성과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만 되고 사실상 형식적인 운영에 그쳤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2018년 7월 새로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지만 실제로 실행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실행력을 담보하려면 위탁운용사 선정 시 코드 이행 여부를 엄격히 파악하여 인센티브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1200조원을 넘은 가운데 연금보험료 인상과 모수 개혁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금 고갈 시점은 15년가량 늦춰졌지만 국민연금이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로만 머물러선 안 된다.
기금의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을 감안하면 장기 관점에서 평가와 운용 기준이 필요하다. 위탁운용사에 자금을 맡길 때도 단기 성과만 볼 게 아니라 스튜어드십 코드 준수 여부 등을 포함해 ESG 등 비재무적 요소까지 통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또한 국내 주식과 실물 투자에 대한 비중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국민경제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국내 주식 비중이 12% 정도인데 이는 20%까지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근 발생한 사모펀드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MBK 등 사모펀드의 투자 행태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사모펀드는 기업의 내재가치가 저평가된 부분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모 자금은 대개 만기가 정해져 있어 투자금 회수를 목표로 단기적 의사 결정을 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MKB파트너스가 홈플러스 인수 이후 설비투자를 줄이고 점포 매각을 진행하면서 결국 수익성과 시장점유율이 하락했다. 이처럼 단기 수익 중심의 경영은 산업 전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밸류업(Value-Up) 논의에서 ESG가 빠졌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ROE를 높이기 위해 주주 환원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고질병을 해결할 수 없다. 단기 수익률에만 치중해서는 장기적 가치 제고는 어렵다."
-서스틴베스트의 ESG 평가 방식은 글로벌 평가기관들과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나.
"서스틴베스트는 ESG 평가에서 '국가별 맥락과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글로벌 평가 기관인 MSCI, 서스테이널리틱스(Sustainalytics) 등이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 중심의 시각을 바탕으로 한 기준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예컨대 '다양성(diversity)'이라는 항목만 보더라도 미국은 인종 간 형평성과 차별 문제가 핵심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인종보다는 젠더, 세대, 학벌 등에서 다양성과 획일성 문제가 더 두드러진다. 따라서 글로벌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에 맞는 사회적(Social) 이슈를 반영해야 평가의 현실성이 확보된다.
거버넌스(G) 측면에서도 한국은 재벌 중심의 독특한 대기업 구조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지배주주의 이익 보호에 치우친 이사회 운영, 형식적인 사외이사 제도, 충실의무의 불균형 등은 국내 고유의 지배구조 이슈다. 글로벌 기관의 기준만 맹신해서는 한국 기업의 실제 위험을 제대로 평가해 분석·반영할 수 없다. 따라서 토종 의결권 자문사가 성장해 한국 투자자들의 실질적인 의결권 행사에 힘을 실어줘야 하며 글로벌 기관과는 다른 평가 프레임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서스틴베스트에서는 C등급을 받은 기업이 글로벌 기관에서는 A등급을 받기도 한다'며 평가의 일관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글로벌 평가 기관의 기준이 정답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본다.
재무적 지표는 국경을 넘어서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지만 ESG 평가는 각국의 사회적·제도적 맥락에 따라 해석과 접근이 달라져야 한다. 특히 ‘소셜’ 부문은 국가별 차이가 클 수밖에 없고, 지배구조 역시 한국적 현실을 외면한 글로벌 기준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서스틴베스트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가장 어려운 점은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도, 행동주의 투자자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내재 가치를 높이는 쪽이 누구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기업들이 전통적으로 지배주주 이익 중심으로 움직여왔고, 이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신과 분노가 크다. 우리처럼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는 기관은 오히려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기도 한다.
서스틴베스트는 ESG 평가 초창기부터 비재무 정보를 기반으로 한 기업 가치 평가를 시도해온 개척자다. 이 산업의 리더로서 평가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실질적인 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을 유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앞으로도 ESG 평가뿐 아니라 전략 자문, 의결권 자문을 통해 한국 자본시장의 책임투자를 이끄는 역할을 지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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