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40) 한국어라 할까? 조선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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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이사장
입력 2022-1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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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이사장]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가슴에 제2의 고향을 심는 것과 같다. 그 나라 말을 통해서 문화를 익히고 교류를 통해서 정을 나누고 자연스럽게 그나라 문화의 전도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7일 하노이 교외의 한 단독 주택에서 북한으로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 사람들이 유학 50주년을 자축하는 모임이 있었다. 함흥 유학파들의 모임이었다. 북한은 베트남이 어려울 때 도와준 베트남의 우방국이다. 북한은 호찌민 주석이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고 건국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승인하였다. 북한과 베트남은 1950년 1월 31일 수교하였고, 그해 10월 25일 상주대사관을 교환 개설하였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그해에 북한은 베트남에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베트남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자 북한은 현금 및 물자를 지원하였고, 베트남 유학생을 받아 교육을 시켜 주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는 203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군 14명이 베트남에서 전사하였다. 호찌민 주석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해외로 유학을 보내 종전 후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육성하였고, 그러한 계획하에 북한에도 베트남 유학생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은 (구)소련으로 제일 많이 유학을 보냈고, 다음이 북한, 중국, 쿠바, 동구권 여러 나라 순서로 유학생을 보냈다.

 올해가 67년도에 북한으로 가서 5년 후인 1972년에 유학을 마친 이들의 졸업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에 북한 함흥지역 유학파들이 모였다. 1963년도부터 북한으로 유학을 갔는데, 초기에는 학생 수가 많지 않다가 1965년에 조금 더 늘었고, 1967년에 유학생 수가 가장 많았다. 북한으로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 유학생들은 북조선과 베트남의 우호 관계 증진에 주축이 되었고,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자 이들의 통역 활동이 초창기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번 베트남에 있는 함흥 유학 50주년 기념 모임은 유학생 가운데 사업으로 가장 성공한 HANVICO 회장 팜반뚜언(Phạm Văn Tuần:75)의 자택에서 음식을 준비하였다. 팜반뚜언 회장은 침구류를 생산 판매하는 회사로 설립 23년이 되었고, 미얀마에도 공장이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는 베트남의 문학 걸작 “쭈옌끼에우”의 저자 응우옌주의 고향이 있는 하띤성 출신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응우옌주의 인본주의 경영철학으로 승부를 걸었다. 조상을 모시는 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사람을 모시는 일을 경영에 중심으로 삼았다.

 몸이 아프거나 출장으로 참석이 어려운 회원을 제외하고는 북부 베트남에 있는 회원들은 이번 모임에 거의 다 모였다. 회식에 앞서 악대와 가수가 번갈아 가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로 분위기를 돋구었다. 첫 곡은 아리랑으로 시작되었다. 가수가 아리랑을 부르자 합창으로 바뀌었다. 회원 가운데 시인 한 분은 자작시를 낭송하였다. 함흥해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어리니 언제 한번 다시 가 볼까나? 하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였다. 이어서 한국주재 3대 베트남 대사를 역임한 즈엉찐특(80) 대사의 단결과 건강을 기원하는 덕담이 담긴 축사도 있었다. 즈엉찐특 대사는 평양 유학파이지만 특별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음식은 베트남 음식에 더하여 한국식으로 담근 김치, 고추장, 된장, 푸른 고추가 곁들어져 있었다. 김치는 북한여성으로 베트남 남성과 결혼한 화제의 주인공 팜응옥까인(73)씨의 부인 리영희(74) 여사가 함흥 아낙네의 솜씨로 김치를 매콤하게 담가 왔다. 남편 팜응옥까인씨는 김일성 뱃지를 자랑스럽게 양복 왼쪽 옷깃에 달고 있었다. 팜응옥까인씨는 18살이 된 1967년에 북한으로 유학을 갔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낯선 북조선 함흥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71년에 흥남시 소재 비료공장에 실습을 나갔다가 실험실에 근무하는 아가씨 리영희씨를 우연히 만나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첫 만남 이후 31년 만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2002년 결혼 당시 신랑은 53세, 신부는 54세였다. 이들은 북한 여성과 베트남 남성이 가정을 꾸린 다문화가정 1호가 되었다. 북한 당국이 2002년도에서야 리영희씨에게 외국인과 혼인을 허락한다는 정식 문서를 발급하였고, 머나먼 남쪽 나라로 시집을 온 것이다. 너무 늦게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도 없다. 
 

[팜응옥까인-리영희 부부의 현재 모습(사진=팜응옥까인 제공)]

 하노이에서 2002년에 국제결혼식을 올린 두 부부는 올해로 결혼 20주년을 맞이하였다. 회원들 모두 북한에서의 유학 생활의 애환을 반추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50년이나 지났음에도 북한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는 노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가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유학생으로 선발된 이들은 모두가 수재들이었고,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는 자부심과 국가를 위해 한몫하겠다는 애국심으로 가득 찼던 젊은이들이었다.

 김책공업대학교 광산학과를 나왔다는 분이 말을 걸어왔다. “안 선생! 한 가지 물어봅시다. 조선 아니 한국은 언제 통일 할꺼요? 빨리 통일하시라요. 한민족인데 같이 힘을 합쳐야디요.” 이들에게는 ‘한국어’ 보다는 ‘조선어’가, ‘한반도’ 보다 ‘조선반도’가 더 익숙한 말이다. 금년은 베트남과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로 1992년 수교 당시 보다 교역 규모가 200배 증가한 1천억 달러, 한국 투자 기업체 수가 1만여 개, 누적투자 액수가 1천억 달러를 눈앞에 둔 사상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베트남에서 ‘남조선’, ‘조선반도’, ‘조선어’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의 마음속에는 북한이 제2의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화통일만이 유일한 통일 방법임을 주장하는 북한집권층이 엄존함에도, 남북한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세상, 금강산, 묘향산을 자유롭게 올라가 북한 동포들과 얘기하고, 서울역에서 KTX타고 평양을 구경하러 가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진보 좌파 세력이 득세를 하고 있는 한 ‘남조선’, ‘조선반도’, ‘조선어’ 등등은 듣기 싫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함흥 유학생회 (뚜언 회장 앞줄 좌에서 우로 2번째, 특 대사 3번째)]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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