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철의 AI 인문학] ④ 시계왕국 조선의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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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철 휴센텍 대표이사
입력 2021-10-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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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중국 과학서에 실린 코끼리 물시계를 보며 장영실에게 물었다.
"영실이, 코끼리 없이도 이걸 만들 수 있겠나?"
장영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폐하. 조선의 자동시계를 반드시 만들어 보겠나이다."

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영화 '천문'의 첫 장면을 약간 각색해 봤다. 장영실은 세종 16년(1434) 6월 자격루를 완성했다. 당시 이 첨단 시보장치가 자동으로 물을 끌어 올리고 인형을 움직여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물이라는 입력값을 넣으면 스스로 작동해 시간이라는 결과값을 내는 지능장치, 바꿔 말하면 인공지능이었다.

농경사회 조선의 통치자 세종은 날씨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천문과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세종의 의중을 읽은 장영실은 중국책에 소개된 중세 이슬람 과학자인 알 자자리의 코끼리 시계 그림을 벤치마킹했고, 더 업그레이드해서 조선에 맞는 자동 물시계를 발명한 것이었다. 이로서 조선은 시계왕국의 길을 걷게 됐다.

자격루가 발명되고 4년 뒤, 장영실은 매우 정교한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을 선보였다. 바로 '흠경각 옥루(欽敬閣 玉樓)'라는 천문시계였다. 세종실록에선 이 놀라운 조선의 인공지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천륜에 연결된 혼천의 태양이 구름덮인 산모롱이를 넘나들며 낮에는 산 밖으로, 밤에는 산 속으로 들고 나기를 반복한다. 햇님 밑에 사방으로 서있는 네 명의 옥녀(玉女)는 손에 잡은 금색 종을 1시간마다 울릴 때, 4신 동물은 직각으로 회전한다. 청룡신, 주작신이 시간에 맞춰 나타나고 사라지며,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계절이 표현되고, 1년간 농사짓는 모습이 '빙풍도'에 나타난다. 이 모든 동작이 하단에 감춰진 수차의 동력으로 366개의 기륜과 이에 연결된 12신기륜, 시보기륜, 4신 기륜과 천륜이 회전하며 표현된 것이다."
 

국립중앙과학관 흠경각옥루 복원도(내부구조) [사진=국립중앙과학관 제공]


2019년, 문헌으로만 존재하던 흠경각 옥루가 581년 만에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복원됐다. 세종실록에는 1438년 1월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장영실이 제작한 높이 3m, 가로와 세로 3.4m의 옥루를 설치한 흠경각이 완성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우승지 김돈에게 건립과정과 옥루를 설명하는 '흠경각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영실이 물시계를 개발하기 위해 벤치마킹 했던 또 하나의 물시계는 북송의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였다. 세계 최초의 자동 시계라고도 하는 거대한 시계탑은 서기 1000년대 말,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이 발명, 북송의 수도에 지어졌다고 한다. 소송의 '신의상법요(新儀象法要, 1092)'에 의하면, 이 시계탑의 높이는 12m, 너비는 7m, 내부는 3층으로 구성돼 있다. 3층에는 천체 관측 기구(혼의, 渾儀), 2층에는 별자리 관측 기구(혼상, 渾象) 등 천문기구, 1층에는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보 장치이자 동력 기구인 사진(司辰)과 주동력원인 수차 '주야기륜(晝夜機輪)'이 들어간 천문대였다. 수운의상대는 비가역적인 동력 장치에서 발생한 수력을 받아 작동했다. 꼭대기에 설치된 목각 인형은 내부의 복잡한 기계장치와 연결돼 북과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조선의 자격루와 흠경각옥루는 조선의 시간 셈법인 12지신과 계절의 변화를 반영한 더욱 정교한 인지적 정보처리장치였다. 장영실의 인공지능은 17세기 송이영(생몰년 미상)이 만든 혼천시계로 이어진다. 혼천시계는 혼천의에 자명종의 원리를 결합, 우주의 시공간 정보를 처리해 이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과학사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은 "세계 유명 과학 박물관이 반드시 혼천시계의 복제품을 소장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동서양이 결합한 조선의 첨단 시계기술을 극찬했다. 혼천시계가 단순히 시계에 접목된 '기술'이 아니라 여러 기술을 융합해, 진보된 새로운 기술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스마트폰 기술과도 닮아 있다. 스마트폰이 미국에서 발명되기는 했으나 최첨단 스마트폰 기술은 우리나라가 주도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의 세포에는 업그레이드 DNA가 각인돼 있는 게 아닐까?
 
중세의 엑스마키나
영화 '엑스마키나(Ex Machina)'의 도입부에는 이런 자막이 흐른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선을 지우는 것은 인간과 신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선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천재 개발자가 만든 최첨단 인공지능 로봇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것인지를 밝히는 새로운 튜링 테스트가 진행된다. 점점 로봇도 그 로봇의 창조자도 그리고 프로그래머도 자신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로봇은 기계의 한계를 모두 지우고 인간보다 더한 인격체가 된다. 이와 같은 스토리는 중세시대 때 처음 나왔다고 한다.

중세 말, 유럽과 이슬람 왕족과 귀족의 사치품은 오토마타였다. 사람과 동물 형상을 한 오토마타와 자동 분수가 궁전을 방문한 손님에게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면서 '플렉스'하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의 오토마타는 뻐꾸기 시계처럼 지극히 제한된 동작만을 수행하는 기계장치였다. 당시의 작가는 오토마타에 주술적인 생명력을 가미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중에 대표작은 아더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수의 란슬롯(Lancelot Du Lac)'으로, 1220년 경 프랑스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란슬롯이 무시무시한 마법의 궁전에 진입하면서 청동로봇 기사를 무찌르고 청동로봇 소녀를 만나서 받은 열쇠로 마법의 상자를 열어 왕비를 구출한다"는 스토리다. 로봇이 군인이나 하인과 같이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세상, 오늘날 전쟁용 드론과 소프트뱅크의 페퍼가 움직이는 세상을 800년 전에 그린 것이다.

란슬롯 이야기를 인공지능 소설의 효시로 삼는 이유는 스토리에 등장하는 로봇이 신이 아니라 인간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미래에 기술로써 새로운 세상을 창세할 수 있다는 '기술창세론'의 서막이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감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감성도 대부분 사회적 학습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인공지능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싱귤래리티 이후, 인간보다 더 인간스러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나올 수 있다. 이 로봇이 인간의 사악한 면만을 모두 학습한다면 어떻게 될까?
 
'로봇 공학의 아버지' 알 자자리
"나는 놀라운 제어력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계들을 만드는 데 푹 빠지고 말았다."

이스마엘 알 자자리(Ismail Al-Jazari, 1136~1206)가 1206년에 그의 책, <독창적 기계장치에 대한 지식의 책>에 서술한 구절이다. 헤론 이후 버누 무사 형제, 서양의 중세 발명가까지 인류는 수많은 오토마타를 고안했고, 오토마타를 통해 과학적 원리를 예술로 승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기존보다 더 로봇다운 오토마타를 발명한 그는 <기계술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해설>이라는 책을 저술, 체계적인 기계 설계에 관한 지식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알 자자리의 책에 소개된 '코끼리 시계' [사진=위키피디아]


알 자자리의 발명품은 창의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종과 장영실이 참고로 한 코끼리 물시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이 시계는 두바이의 한 쇼핑몰에 복원돼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시계의 시간 조절 장치는 코끼리 복부의 수조에 위치한 용기이다. 이 용기는 30분이 지나면 물이 차서 가라앉게 되는데, 이때, 코끼리의 등에 있는 구조물과 연결된 장치를 통해 연쇄반응이 일어나 오토마타가 작동한다. 작동이 끝나면, 용기는 저절로 다시 부상한다.

알 자자리의 책에는 물을 끌어 올리는 장치, 물시계, 양초 시계, 자동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기계, 물 분배기 그리고 펌프 등 100종의 기계장치와 80종의 마술 선박(Trick Vessel)이 소개됐다. 그가 발명한 크랭크와 캠축이 수압식 펌프에 적용됐는데, 크랭크는 회전 운동을 피스톤 왕복 운동으로 바꿔 강력한 힘으로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알 자자리의 펌프는 약 300년 이후,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증기펌프 및 내연기관, 자동 제어 장치의 원조 격이다. 그의 제어장치 발명을 높이 인정하는 현대의 로봇과학자들은 그를 ‘로봇공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인공지능 이론의 시작
인공지능 이론은 카탈로니아 시인이자 신학자인 라몬 유이(Ramon Llull, 1232 ~ 1315)에 의해 시작됐다. 유이는 단순 단어와 개념의 조합 장치이론과 뇌와 마음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인 분석으로 인공지능 이론을 정립했다.

1308년 유이는 '유이 서클'이란 에니어그램(Enneagram)을 개발했다. 유이의 책 <아르스 마그나>에 소개된 그의 서클은 기계를 활용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방법론을 완성, 기계적인 장치를 통해 이성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유이 서클은 중심축이 고정되고 회전 가능한 세 개의 종이 서클이 중첩된 형태이다. 각 원형 종이 경계에는 단어와 글자가 적혀 있는데, 서클이 돌아가면서 글자와 단어를 일렬로 배치하면 논리적인 탐구가 가능하다. 유이는 이 서클을 통해 종교와 존재에 대한 질문에 더 높은 차원의 대답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유이 서클은 지식을 만드는 기계장치의 원형이다. 유이는 지극히 근원적이지만 실용적인 방법으로 기계장치에 의해 인간의 생각이 묘사될 수 있고 모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인공지능의 초기 개념을 정리했다. 이 연구는 15세기 지오바니 폰타나(Giovanni de la Fontana)와 16세기 지오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 17세기에 와서는 아타나시우스 커처(Athanasius Kircher)와 고트프리드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에 의해 발전돼 갔다.
 
가상현실의 효시
중세에도 가상현실이 존재했다? 놀랍게도 1300년경 프랑스의 헤스딘에는 로봇공원이 개장, 오늘날 우리가 가상현실로 부르는 경이로움을 제공했다. 이 공원에는 원숭이, 새를 비롯 인간을 닮은 많은 오토마타가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공원을 고안한 사람은 당시 군사 지도자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던 아르투아 백작 로버트 2세(Robert II, Count of Artois, 1250~1302). 당시 로봇 공원은 이슬람의 기술과 프랑스의 오토마타 스토리에 영향을 받아 중세의 종교적, 주술적 사고에서 벗어나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경이로운 원더랜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헤스딘 공원에는 자동 인형과 인공가설물, 특수 거울, 물을 뿜고 밀가루를 뿜는 장치 등 격렬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오토마타와 부비트랩이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원더랜드의 설계자는 방문객이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치환하는 감정적 반응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트릭 창을 열면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화살이 아닌 물로 쏘는 등, 헤스딘에서는 군사 및 농업 공학에 익숙한 기술과 장치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요즘으로 말하면 가상현실과 같은 체험을 제공한 것이다.
 

강시철 휴센택 대표 [사진=강시철 휴센텍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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