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하늘ㆍ세상ㆍ인간 보는 법 배워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7-07 17:2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㉕ 김원호 이사장 <下>

1972년 유신통치가 막을 올리면서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심각한 제약이 가해졌지만 공포정치로 인해 야당, 대학, 교회 등 사회 각계가 저항을 못 하고 침묵하고 있었다. 공포의 침묵 속에서 지학순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이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 것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해서 결성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런 기운이 있었죠. 김수환 추기경이 1971년 미사 때 민감한 발언을 하자 중계방송이 끊긴 일이 있었거든요. KBS에서 중계하는 성탄 미사였죠. 김 추기경이 사회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하자 약한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기에 천주교가 발을 맞추어 함께 걸어갔죠. 명동성당이 말하자면 옛날 소도(蘇塗)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가 한을 표현하는 장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위기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이 결성되고, 그 교육을 위해 신앙인 사회학교가 만들어졌죠. 사회의 어두운 곳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서울 가회동 성당을 찾은 김원호 이사장.

-1987년 6월 항쟁 때 신부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 보수로 양극화하면서 천주교의 정의구현 사제단 활동에 대해 보수층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천주교 신자가 50만 명 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구의 1할 정도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교회가 다시 보수화했죠. 아픔을 달래주는 교회가 아니라, 현실에 안주해서 종교 행위를 하고, 교회에도 그런 신자들이 늘어나는 보수화가 진행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는 진보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수 진보의 갈등이 심한 편입니다.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골이 깊어지고 있지요. 이 갭이 커지면 어디로 귀착이 되겠습니까.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가 편중되게 어느 한쪽에 많이 주어지는,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 일이죠.
부동산이나 학교 교육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니까. 이것을 잡아줘야 합니다. 남북문제도 좌우 갈등에 이용되고 있지요. 무엇이 사실인가? 사실을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진영논리에 따라 각자 자기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함석헌 선생 같은 어른이 그리워지는 것이죠. 진정 우리 사회가 가야 하는 길이 어느 길이어야 하는가. 갈등을 치유하고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각기 이해관계에 억눌려서 해결방안이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보수화는 김 이사장의 개인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전국에 8,000명의 사제가 있다. 이중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는 800명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 원로 신부는 김 이사장에 대해 “가톨릭 평신도가 550만 명에 이르고 이 중에 진보적인 평신도 단체 5개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지금도 뒤치다꺼리를 다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내부에서 보수 진보의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현상은 민주화가 많이 진척되었기 때문에 뜨거운 공동의 목표가 상실된 현상은 아닐까요.
“그 시대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밝아졌다고 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해치는 거짓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영향력이 큰 정치 세력이 문제죠. 상대방이 무엇을 한다 해도 다 반대를 하니까요. 어떤 관점에서 정책을 펴나가고, 법안을 만들어가야 합니까. 공동선을 생각해서 나오는 법률이기보다는 어느 계층을 더 위해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국민 국민’ 하니까 그 부분에서의 거리감이 있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믿음을 잃은 사회라는 것이죠.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면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조부 때부터 가톨릭을 믿은 집안 분위기에서 신부가 되려고 했다는데 그 뜻을 중도에 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집안에서 삼촌과 사촌 형이 사제의 길을 갔어요. 나도 제대로 사는 길은 신부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가톨릭 대학에 가려고 공부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혼자 사셨거든요. 6‧25 때 고향인 진천에서 아버님이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생사를 모르지요. 저는 외아들이고요. 예전에 신부는 부모를 모시지 못했어요. 외아들이 신부가 되면 어머니를 노후에 모실 사람이 없게 되니까요. 외삼촌께서 ‘네가 신부가 되면 네 엄마는 어찌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리시더라고요. 젊었을 때 생각해봤던 길이지만 지금은 아쉬움이 없어요. 신부가 못된 대신에 철학과를 갔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상이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지요.
학교에 다니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부의 길에서 멀어졌지요. 우리가 예수처럼 살아간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변리사가 된 경력이 특이합니다.
“신학교 가는 꿈을 접고, 타협한 전공이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이 살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학문으로 생각했어요. 사실 잘못 생각한 거죠. 그걸 제시해주는 학문은 없거든요. 내가 앞으로 살아갈 목적의식을 제시해줄 줄 알고 선택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직장생활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전공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대학원은 경영대학원을 다녔어요. 그리고 장사를 하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내가 너를 장사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시킨 줄 아냐’고 공부 더하라고 했어요. 경영대학원에 들어가 2년을 배웠죠.
아주경제가 있는 이 건물이 이마빌딩이죠. 여기에 옛날에 가장 큰 특허 사무소가 있었어요. 이병호라고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던 분이 아버님과 고향이 같은 충북 진천이거든요. 아버님과 비슷한 연배에 같은 소학교를 나와서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이리로 옮겨와서 변리사 자격증 없이 5년 반 정도 근무했죠. 그러다가 그분은 사무실에서 내가 심복 노릇을 하길 원했는데, 나는 직원들의 처우 같은 것을 강조했지요. 그분이 ‘저놈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해고를 했죠. 그게 오히려 약이 되어서 공부할 기회를 얻어 변리사 시험을 치게 되었죠. 그리고 개업을 해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틈에 내 사무실이 중앙 특허사무소보다도 더 커졌지요.
이름은 유미특허법인입니다. 김앤장을 빼면 랭킹 1위인 셈이죠. 파트너십 제도에 따라서 나는 지분을 물려주고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보통은 죽을 때까지 하거든요. 나는 70에 은퇴했지만 창립자여서 고문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전화위복이죠. 이병호 변호사께 감사한 일이죠. 그래도 나는 따로 변리사 사무소를 하면서도 그분 사무실로 출근하는 꿈을 많이 꾸었어요. 정이 많이 들었던 터라.”
다석은 좋은 일이라면 돈을 선뜻 내놓았다. 다석처럼 언행일치의 삶을 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김 이사장은 “내 몫의 어느 부분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려주는 취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게 종교의 정신이죠”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도 변리사를 하면서 월급의 일정 부분은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월급의 반은 집사람 주고, 반은 내가 썼어요. 그러고 내가 가진 반 중에서 기부를 한 것이죠. 그것도 나중에 또 사무실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이후에 일이지 그전에는 사무실 꾸려가기가 녹록지 않았고, 빚도 있었습니다. 고마운 것은 그런 일을 할 때 집사람이 한 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했다고 했어요. 정양모 신부가 그런 점에서 집 사람을 칭찬했죠. 그런 관점에서 제가 가진 것의 반 정도는 사회활동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충당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죠.
다석강의라는 책을 만드는 데 1억이 든다고 해서 정양모 신부에게 1억을 드렸는데 돈이 남았어요. 그래서 다석학회를 만들고 남은 돈을 거기로 돌렸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더군요. 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까?
“저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 하고 보증 섰다가 집사람을 힘들게 한 일이 있었지요. 내가 대학원 1학년 때 23번 버스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었습니다. 전태일 씨와 나는 똑같은 나이였죠. 그런 뉴스를 접하고 이렇게 편안하게 공부하는 나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거죠. 인간이 살아가려면 저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쭉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죠.”
-성경에서 어떤 구절을 제일 좋아합니까?
“예수께서 수난 전날 밤에 언덕에 올라서 바친 기도가 있죠.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구절(마태복음 26:39)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고 죽을 때 이러고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복음 19:30). 숨을 거두면서 ‘이제 다 이뤘다’고 하셨거든요.”
-에코피스 아시아(Ecopeace Asia) 이사로 활동하던데요. 우리는 식민지, 전쟁을 겪고,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환경에 눈 뜰 여유를 갖지 못했는데 다석은 시대를 앞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자기 곁에 있는 대상들이 수단이 아니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다석이 했기 때문이죠. 사람을 수단화해도 사달이 나듯이 다른 생명체를 수단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먹고서 살아가고 있어서 죄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대로 된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먹더라도 제대로 키워서 먹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것이 우리 지구를 보존시키는 길로 이어지겠지요. 다석이 식사하는 것을 제사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어요. 예수도 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제물이었죠. 우리가 다른 생명을 제물 삼아서 살아가는 나는 제사의 값을 해야죠.”
-다석에 관해 학자와 제자들이 많은 책을 썼는데, 다석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인지요.
“내가 본 것은 극히 한정적이지만 <다석 강의>와 박재순 교수의 <다석 류영모>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이 상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성서조선> 글을 모아놓은 <오늘>이라는 책이 있어요. 다석이 ‘오늘을 오 느을 같이 살라’고 했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셨다는데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역시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에 예수께서 설교했던 곳, 겟세마네 동산, 장례 치른 곳, 태어난 곳,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한 곳에 들어선 성당도 있죠. 그러나 그분이 있었을 때 성지(聖地)지, 그분이 떠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건 과거지사이죠. 이스라엘의 성지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땅도 모두 성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죠. 인간 삶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면 모두 성지 아닐까요.”

황호택 고문과 인터뷰하는 김원호 이사장(왼쪽). [사진=윤영은 기자]



-아까 신부가 안 된 이유를 들면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는데, 대학생 때 만난 건가요? 두 분의 러브 스토리를 양념 삼아 말해 주시죠.
“저희는 이태원 성당에서 만났어요. 196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교회 봉사활동도 같이 했죠.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저 사람과 사귀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때부터 5년을 사귀었죠. 결혼하기까지 거의 9년을 만났지요.
친구 시절에도 서로 존경했고, 그 뒤에 존경이 뜨거워지니까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묘한 것이 첫날밤이 첫날밤이었어요. 루소의 <에밀>에도 나오지만 그런 것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였지요. 만나면 대화가 많았죠. 결혼 생활을 한 이후에는 연애 시절보다 대화가 없어졌습니다.”
-자녀는 어떻게 되나요?
“셋을 두었어요. 딸, 아들, 딸. 올해가 결혼한 지 49년이거든요. 제일 큰 애가 49살이고. 손주가 일곱이나 됩니다. 어머님도 96세이십니다.
아주 집사람에게 고맙죠. 외아들이 좋은 게 하나 있어요. 누구에게 미룰 수가 없다는 것이죠.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한 학년 위의 여자를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저 애를 사귈 바엔 수산나(부인의 세례명)를 사귀라고 했어요. 장모님도 저를 좋아했고 어머님도 수산나를 좋아했죠.”
-다석을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다석처럼 사는 씨알들이 흔치 않은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주신다면….
“다석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어려움이 없으셨던 분이죠.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던 여건이 돼 있었던 셈이죠. 그분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본받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의 일상 속에서 하늘과 세상 그리고 인간들을 바라다보는 눈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실제 내 행동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경천애민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에게 다석 릴레이 인터뷰 대상에게 공통으로 하는 “나에게 다석이란?”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다석이란 내 삶의 사표(師表)입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